04/14/2019 - 나귀타신 예수님을 따르자 [마가복음 11:1-10]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오늘 말씀보면,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향하여서, 종려나무가지를 꺽어 흔들고, 자신들의 옷을 벗어 길거리에 깔며 예수님을 환영했습다. 그렇게 한 이유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메시야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그토록 열렬히 응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나타냈던 존재가 있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타셨던 나귀, 그것도 나귀의 새끼입니다. 사람들은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500년전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기억해냈습니다.
스가랴 9:9절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나귀는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입성하시기 전에, 두 제자에게 나귀를 가지고 오도록 합니다. “맞은편 마을로 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볼텐데 풀어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이 일러주신 대로 가보니 예수님 말씀대로 나귀가 묶여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풀어서 가져 오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라고 묻습니다. 누가복음19:33에 보면, 그 나귀의 임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당황하지 않고 예수님이 일러주신대로 “주께서 쓰시겠다.”라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나귀의 임자들은 그 나귀를 제자들에게 주고, 제자들은 그 묶여있던 나귀를 풀어서 끌고 예수님께로 옵니다.
이 모습을 통해서 나귀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에 주인이시고, 예수님께서 쓰시겠다고 한다면 그것을 내어 드려야 하는 것이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는 사람들의 도리인 것입니다.
제자들이 나귀를 가지고 왔을 때에, 예수님은 그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을 들어가십니다. 사람들은 나귀새끼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우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예루살렘 사람들은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보면서,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이 성취됨을 깨닫고 흥분합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향해서 “호산나”를 외칩니다. 호산나는 헬라어로 “오! 구원해 주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기대하며, 그렇게 환영하며 외칩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앞뒤로 따라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할 메시야임을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내시기 위해, 그 많은 짐승 중에 하필 나귀라는 짐승을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나귀를 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이루실 진정한 공의와 구원은 어떠한 모습으로 이루어질 것인지를 살피고,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이 타셨던 나귀와 같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드러내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평화의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메시야가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그분은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했습니다. 나귀는 전쟁 때 타는 것이 아니라, 평화 때 타는 짐승입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심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은 평화의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평화를 주장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당시 대제국을 이루고 있던 로마제국도 평화를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역사학자은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가 내란을 수습하고 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후 약 200년간 비교적 안정된 시기가 있었는데 이 때를 팍스 로마나 Pax Romana 로마의 평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로마 사람들은 이 때를 평화의 때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로마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로마제국은 식민지 사람들을 억압하고 학대했습니다.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불에 타고 무너졌던 70년도 바로 이 팍스 로마나 때의 일입니다. 티투스 장군은 군마를 타고 식민지 사람들을 짓밟으며 자신들만의 의와 평화를 만들어 나갔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백마를 타고서 의와 구원을 이루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땅의 구원을 말하지만, 자신만의 구원을 위해 다른 이들을 억압하고, 의를 이룬다고 하면서 불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왕이 되어 다스리는 이 땅에서는 불의와 억압이 있었고, 그 가운데 전쟁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말을 탄 왕들과 영웅들을 따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예수님께서도 스가랴의 예언대로, 공의와 구원을 위해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쟁을 위한 말을 타고 오신 것이 아니라, 평화를 의미하는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공의와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평화의 방법을 제시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을 따라 평화의 모습으로, 이땅에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을 이루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나귀를 탄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들의 마음속에는, 힘있는 말을 탄 예수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강력한 지도력과 능력을 가지고, 로마와 대항해서 그들을 압제함으로 승리를 이루고, 구원함을 얻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억누르던 로마제국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의 의와 평화를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쫓으려고 하니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지 못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질렀던 것입니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말하지만, 로마와 같은 평화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강력한 지식과 권력, 능력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억압함으로 자신들이 추구하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의와 평화를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호기롭게 백마를 탄 왕들을 따른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죄인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귀를 타시고 평화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그 답답하신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자들이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2. 신약 성경에 보면, 나귀를 타고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 살았던 사람이 있는데,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백마를 탄 자들과 같이 행동했습니다. 예수 믿는 이들을 잡아서 학대하기 위해서 대제사장들로부터 종교적인 권력을 위임받아서 다메섹까지 갈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며,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사도바울은 180도로 바뀌게 됩니다. 그는 더 이상 백마를 타고 사람들을 압제하는 세상 권력자들의 모습을 따라 살아가지 않습니다. 반대로 예수님과 같이 나귀탄 자의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와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평화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믿은 후에, 그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수없이 등장합니다. 사도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은, 사도바울을 욕을 하기도 하고, 돌을 던져 바울이 죽을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먹지도 않겠다는 결사대까지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러한 이들을 향해서 전쟁하려고 하지 않고, 평화하려고 했습니다.
로마서 12:18절에, “할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갈등, 자유인과 노예들의 갈등 등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평화롭게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 또한 이방인들을 품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살았습니다.
갈라디아서 4:19절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과는 다른 민족인 이방 사람들을 품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해산하는 고통을 감수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은 갈등과 전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는 공의와 구원을 쟁취하기 위해서 다른 이들을 억압하고 불의하게 대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방법이 아닙니다.
때로 가정안에 말을 탄자가 있기도 합니다. 교회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사회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말을 타고 권력을 휘두르며 다른 이를 억누르는 자가 아니라, 평화의 모습으로 억눌린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자인 줄로 믿습니다.
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심으로, 겸손히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실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메시야는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곧 나귀새끼를 탄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나귀는 대단한 인물들이 타는 동물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위대하다고 자부하는 왕이나 권세자들이 나귀를 탄자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귀를 타신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의 겸손함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겸손함은 단순히 나귀를 탔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나귀가 주인에게 순종하듯이 또한 하나님께 겸손히 순종하셨습니다.
사람이 능력이 있다고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힘이 없는 짐승이라고 할지라도 교만하여서 고집을 피우고 불순종하면 사용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황소와 같이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겸손히 주인에게 순종할 때에 쓰임받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대단한 지식이나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겸손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히 순종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로 당신의 의와 구원을 이루도록 사용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셨지만, 겸손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에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는 것이 너무 떨리고 죽을 것 같아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이 쉬우셨던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더 힘드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간절하게 기도하셨고, 결국은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하나님이 지어주시는 십자가를 받으셨습니다.
빌립보서 2:6-8절에는 나귀와 같이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은 죽기까지 철저히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고, 죄인들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따른 다는 것은, 자신에게 지어주시는 짐을 겸손히 진다는 것입니다. 나귀는 주인이 맡겨주는 짐을 짊어지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서 지어주시는 짐인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사실 이러한 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위인들에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방주를 짓는 짐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애굽 사람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모세를 부르셔서 그에게 짐을 져 주셨습니다. 베드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짐을 주셨고, 사도 바울에게는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고자 그에게 짐을 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과 같이 겸손하게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쓰임받아, 하나님의 의와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나귀 타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겸손히 다른 이들을 섬김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높이시고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미천한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날밤에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일일이 발을 씻기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면에서 예수님은 누가복음 11:46절에서 율법사들을 책망하십니다.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자신은 섬김을 받고자 하면서, 다른 이들을 섬기지 않는 것은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 아닙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겸손하게 순종하며, 다른 이들의 짐을 져주는 사람이고, 섬기는 사람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의 외침은 이천년전 예수에게만 외쳐졌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이 땅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고 구원자를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세상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백마 탄 자들을 향하여서 호산나를 외치며, 그들이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따릅니다. 자신들의 삶의 구원이 세상의 권력과 부를 가지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들도 뱃마에 오르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의 권력을 구할 때에 자신은 구원할지 모르지만, 또 다른 이들을 억압하고 불의로 대하며 절망의 상태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나의 구원이 다른 이들에게는 얽매임이 되고, 나의 의가 다른 이들에게 불의가 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구원이 아닌 것입니다. 진정한 공의와 구원은 백마를 탄, 이 땅의 왕들을 따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실 예수님에게, 강력한 말을 주시면서 그것을 타고 예루살렘을 입성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어리석고 연약해 보이지만, 평화를 이루어나가며 겸손을 나타낼 나귀에 예수님을 태워서 예루살렘에 보내셨습니다.
세상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는 이 땅에 백마를 타고 의를 이루고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세력가들이 많습니다. 때로 우리 자신이 이러한 말을 타고 가정과 교회, 이 사회에 공의와 구원을 이루겠다고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땅의 공의와 구원은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따름으로 있는 것입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따라 살아갈 때에, 평화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의와 구원이 이 땅에 이루어집니다. 겸손히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짐들을 순종하며 감당할 때에 하나님의 의와 구원의 역사가 지속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이 세상의 구원은 나귀를 탄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이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자 되심을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강함과 권력을 추구하며 경쟁하고 다투는 삶이 아니라, 겸손히 다른 이들을 섬기며 그 짐을 지어 줌으로 평화를 만들고 다른 이들을 구원하는, 그래서 나귀가 쓰임받았던 것처럼, 주님께 더욱 귀하게 쓰임받는 저와 여러분, 우리 교회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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