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4/2017 - 세월을 아끼라 [에베소서 5:15-20]
제가 샌안토니오로 이사 온 후, 샌안토니오 사람이 되었다라는 것을
느낄 때는, NBA 농구에서 샌안토니오 Spurs 를 응원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농구게임을 보면서 흥미로웠던 것을 발견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농구경기 시간이 총 48분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긴장간 넘치는
순간은 경기가 끝나기 몇 분 전이라는 것입니다. 경기 끝나기 5분
정도가 되었을 때, 양팀들은 한 골이라도 더 넣기 위해서 있는 기회들을 다 활용을 합니다. 일부러 반칙하기도 하고, 볼을 충분히 넣을 수 있는데도 일부러 볼을
넣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렸다가 슛을 하기도 합니다. 어떨 때는
1초도 남지 않은 시간인데도 작전타임을 불러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헛되지 않게 사용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그 짧은 순간이라도 승리하기 위해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모든 수단과 기회를 활용을
합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때로는,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해 냈을까? 정말 기가 막히다.”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바울은 에베소교인들에게 권면하는 말이
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의 삶속에서 세월을 낭비하는 모습들이 있지는 않을까 염려해서 주의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생활을 보면 참 바쁘게 삽니다. 아이로부터 연세드신 분들에
이르기까지 바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들 바빠서 피곤해 죽겠다고 합니다. 심지어 이런 우스운 말이 있습니다. "백수가 과로로 죽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수라고 한다면 직장이 없이 노는
사람을 말하는데, 직업은 없지만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이런저런
일들로 바쁘게 살다가 과로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 만큼 모든 사람이 바쁜 삶을 살고 있음을 말합니다.
제가 서울에서 부목사생활을 할 때에 아주 안타까운 죽음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고속도로
공사에서 일하는 40대의 젊은 남자분인데 어느 날 과로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워낙 직장에 일이 많아서 밤낮으로 일하면서 현장을 다니다가 과로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바쁘게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월을 아끼라"라는
말의 원뜻을 보면, "아끼라” 라는 말은 “엑사고라조메노이” 곧 “속량하다, 도로 사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월”은 “카이론”으로 “중요한
시기, 금방 지나가버리는 특별한 기회”입니다. 그러니가 “세월을 아끼라”라는
의미는 “어떤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 그 일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의미로
해석됩니다.
그러면 무슨 일을 위해서 주어진 기회를 최선을 다해 활용해야 하는가는 그 뒤에 나오는 말과 관련되어 알 수 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 왜냐하면 때가 악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때가 악하기 때문에, 성도들은 그 반대로 선한 것을 행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최선으로 선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세상의 악을 따라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세월을 낭비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때는 악하지만, 선을 위하여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행해야 할, 선이라는 것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말하는 선함은 각자의 기준에 따라서 다를 수 있기 떄문입니다.
마가복음 10장:17-18절에
보면,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달려와서 꿇어 앉아 예수님께 묻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합니다. 그런데 영생에 관한 질문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얻는 법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온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서 "선하다."고 불렀는데 그것에 대해서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고, 그 호칭을 수정해 주십니다. "오로지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으시다."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선하지 않고 악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선하다고 일컬어 질 수 있는 기준과 근거도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이라고
하는 것은 이사람 저 사람에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홀로 선하신 분이신 하나님에게서부터 나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 조차도 선하다고 일컬음을 받는 것에 대해서 거부하십니다. 예수님
조차도 선함의 기초를 하나님께 두셨는데, 내가 절대적으로 옳다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재고해 봐야
할 일입니다.
사람들마다 자기의 선이 있고, 사회적인 선이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옳다고 여기는 것이 절대적인 선이 아닙니다. 그
선의 출처는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 당시나 오늘날이나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보시기에 세월을 낭비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 행하지 못하고, 세월을 낭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럴 때에 성도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행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기회를
잘 활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악할 때에 세월을 아끼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삶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세월을 아끼는 삶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먼저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럴 떄 세월을 아낄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때가 악하니 세월을 아끼라”고 에베소교인들에게 말하고 있지만, 에베소 교인들 중에 누가 일부러
악한 일을 하면서 세월을 낭비하고자 하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악하게 살고 싶지 않지만 주의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5절에,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라고 말합니다. 내 행할 것을 주의하여 행해야지, 아니면 악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에 주의해야 할 것은, 자신의 일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근거한 한 것인지, 아닌지를 주의해서 살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고자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에 근거해서 판단하고 행동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보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열심히 사는데 그 시간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헛된 것입니다. 어리석어 보입니다.
요나선지자가 그랬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 명령을 받습니다. 니느웨로 가서 그들에게 임할 심판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요나는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거부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근거한
것이고, 요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대적했던 니느웨사람들에게 경고를 주심으로,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그 명령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요나선지자는 자신의 악한 본성에 끌려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합니다. 니느웨사람들은
이스라엘과 원수된 사람들인데 그들을 상종하는 것도 싫었고,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더욱 싫었습니다. 차라리 멸망받는 것이 좋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악한 본성에 근거해서 니느웨로 가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갔습니다. 그러다가 풍랑을 만나고,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동안
고생도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명령대로 니느웨에 가서 심판을 예고하고,
그곳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요나선지자는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르지 못함으로 세월만 낭비하는 어리석은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자 시간을 써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생활을 하면서 그 뜻을 구하는 것은 지혜롭고 세월을 아끼는 일입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에 나에게 선하게 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러한 어려움을 주셨을까라는
의심이 들고, 그것으로 인해서 좌절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부주의 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때에도 선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신 선하신 뜻이 있음을 믿고서
믿음의 살아가는 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자 힘쓰고 노력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선하게 쓰는 세월을 아끼는 일입니다.
2. 그리고 사도바울은 술취하지 말고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적인 죄성과 연약함을
가지고는 주의 뜻을 따라 행하기가 불가능합니다. 그 선하신 일들을 행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성령충만이 필요합니다.
사도바울은 성령충만과 술취함을 비교하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술취하는
것은 방탕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봐서, 술취한다는 것은 세상의 방탕한 일에 사로 잡혀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술취하게 되면 우리의 세월이 술에 의해서 지배를 받습니다. 술을 과하게
마시다 보면 필름이 끊긴다는 분이 계십니다. 술에 취했을 때에 했던 말과 행동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의 기억에 없지만 술은 여전히 나를 주장해서 말하게 하고 행동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술은 여러가지 모습으로 사람을 다스립니다. 울게 만들기도 하고 반대로
쓸데없이 웃게도 만듭니다. 술에 취하면 말이 없어지거나 주무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어떤 분은 화를 내며
다른 사람과 싸우는 분들도 계십니다. 어떤 사람은 술만 마시면 자기 몸에다가 침을 뱉는다고 합니다. 술에 취하게 되면, 내가 아닌 술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육신의 삶을 즐겁게 하는 것에 취하게 되면 우리의 삶이 방탕하게 됩니다. 선한 일을 행하지 못하고, 악한 일에 연류되어서 세월을 낭비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령충만을 받을 때에 정반대가 됩니다. 성령충만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성령충만을 받게
되면, 나의 죄성과 악함에 의해서 지배를 받지 않고, 세상의
방탕함에 지배를 받지 않고, 성령님의 지배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행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때에, 세월을
아낄 수 있는 방법은, 내 의지와 경험으로 해 보려고 하기보다는 성령님의 임재, 충만을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성령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다스려주시기를 기도하며 내 자신을
비우고, 성령님의 임재와 역사하심을 사모하며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 어떠한 시간보다 성령님의 임재를 위해서 힘써야합니다. 성령님의 충만을 위해서 간구하는 시간은 헛된
시간이 아니라, 세월을 아끼기 위해서 꼭 필요한 시간입니다.
3. 그리고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라고 합니다. 이것 또한 세월을 아끼는 일입니다.
세상의 악함은 하나님에 대한 대적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비방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방해합니다. 교회를 박해하고 공격하는 일들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세상의 악함입니다.
그런데 교회와 성도는 반대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분을 높이며
예배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예배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낭비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는 실로 세월을 아끼는 귀한 일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범사에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라고 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삶은 세월을 낭비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선한 기회를
놓쳐 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사하지 못함으로, 세월을 낭비하는 커다란 실수를
광야에서 저질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40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오래 걸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부터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지점인 가데스 바네아까지 2년만에 도착합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정탐꾼을 보내 가나안을 정탐하도록
시키십니다. 이제 곧 가나안에 들어갈 것을 준비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출애굽한지 2년 만에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곳에서 정탐꾼이 가지고 온 보고를 듣고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가나안에 사는 사람들이 워낙 강하고, 그들이 사는 성들도 튼튼해서 도저히 그들을 상대로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서 원망합니다. 모세를
돌로 치려고 하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가겠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보시고, 그들에게 벌을 내리시기를 40년간 광야생활을 하도록 합니다. 정탐꾼이 40일간을 정탐했는데, 그 하루를 일년으로 계산해서 40년을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헤매도록 하십니다. 그들은 그 아까운 시간을 광야에서 낭비하게 된 것입니다.
원망하는 삶은 전진하지 못하고, 세월을 낭비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내 기준과 가치에 맞는 것이 선하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날 때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불평과 원망의 삶은 우리의 시간을 낭비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할 시간에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찬양하며
감사하는 삶이 선한 일이며, 세월을 아끼는 삶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모든 일에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감사의 근거가 됨을 말씀하십니다.
골로새서 3:17절에서도,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감사할 때에, “네가 돈이 많은 것으로 힘입어서, 아니면 물질이 많고 출세한 것으로 인해서 아버지게 감사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의 이름을 힘입어 감사하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가장 선하신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비록 초라하고 병들고 어려운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으니, 이 일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 감사치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물질이 많고,건강하고, 세상적으로
잘 나간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며
예배하는 자들은 세월을 아끼며 살아가는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잘 활용하라고 나름대로 시간관리 요령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자신들이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한 시간관리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을 아끼는 것은, 저와 여러분이 악한 때를 살아가고 있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선하심을 드러내는 기회로 활용함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세월, 시간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당신이 주신 시간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루는 일에 사용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 세월을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지혜롭다고
생각할 때에 시간을 낭비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일로 시간을 낭비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근거한 것인지 주의하여 살피며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세상적인 풍요와 즐거움을 위해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데 이는 술취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수고에는 유익이 없고 도리어 방탕한 일입니다. 성령충만을 위해서 세월을 사용하고, 그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에, 우리가 이해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행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며,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세월을 아끼는 일입니다. 특별히 예수의 이름을 통하여서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악한 때의 특징은 하나님께 불평하고 불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삶은 낭비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그것이 세월을 아끼는
삶입니다.
오늘날, 이 땅은 악한 때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세월을 아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세월들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지혜롭고, 풍족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성령충만해서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세월을 아끼는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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