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8/2017 - 팬과 선수: "너희도 가려느냐?" [요한복음 6:60-71]
여러분은 누군가에 팬이 되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샌안토니오에는 농구팀인
스펄스의 팬이 많은 것 같습니다. NBA 농구 시즌에, 샌안토니오팀인 Spurs 의 홈 경기장은 AT&T Center 입니다. 그런데 농구시즌 동안에, 로데오 행사로 인해서 그 경기장을 쓸 수
없을 때에는 원정경기를 떠나는데, 이를 ‘로데오 트립’이라고 합니다. 한 9게임
정도를 홈에서 하지 못하고 다른 도시에서 원정경기를 하게 되니, 로데오 트립 경기 동안에는 Spurs 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확연이 줄어들고, 경기를 잘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Spurs 의 열렬한
팬 중에서는 이러한 ‘로데오 트립’까지도 따라다닌다고 합니다. 상대편 응원팀이 가득한 원정경기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팀을 위해서 멀리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서 응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도 이와 못지 않은 열렬한 팬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에 가장 핫(hot)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디에 계실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지도 않았는데도, 함께 무리를 지어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기대했던 장소에 안 계시니까 배를 타고서 갈릴리 호수를 건너 예수님을 찾으러 가버나움까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의 인기스타와 같았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마치 광팬과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이 영원히 예수님을 따라다니지는 못합니다. 66절을
보니까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떠나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한 동안 예수님을 열렬히 따라다녔고, 성경도 그들을 예수님의 제자라고 기록했지만 결국 그들은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떠났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제자처럼
보였지만 팬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팬과 같이 자신을 응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제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경기할 선수를 원하시지,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
관람하며 응원하다가, 뭔가 내 형편에 맞지 않으면 돌아서는 그러한 팬과 같은 제자를 원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안에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게 하는, 팬과 같은 성향은 무엇인가를 보고, 진정한 제자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왜 따르느냐의 목적을 점검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6:2절에 보면, 왜
큰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는지 그 동기가 나와 있습니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 오시기 전에 예루살렘에 가셨다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누워있던, 38년 동안 병자된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병고치는 기적을 보았고, 그들 중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26절에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또 다른 동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찾아 가버나움까지 온 무리들을 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시기 전 날에, 제자들과 산에 오르시는데, 예수님을 보고자 원하는 큰 무리가 예수님께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무리를 먹이시고자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가지시고 축복기도하신 후, 음식을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오천명쯤 되었는데 그들이 먹고 남은 조각을 거두어 보니 열두 바구니가
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서 다음날 예수님을 찾아서 무리들이 다시 모인 것입니다. 이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너희들이 온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동기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병들어도 문제 없고, 굶어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아서 예수님을 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먹고 마시는 것을 공급받기 위해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들을 구원할 메시야임을 기적들을 통해서
깨닫고, 자신의 육적인 만족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적인 요구들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초점은 예수님이 어떠한 존재인가에 초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통하여 자신의 필요를 채우시는 것에만 관심했습니다. 내가 아플 때 병을 고쳐주시고, 내가 배고플 때에 배고픔을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문제가 있을 때에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의 문제점은, 예수님이 자신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면, 어느 때든지 떠난다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들의 세상적인 필요와 기대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도리어
예수님의 만족을 위해, 자신의 만족을 포기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목적은 예수님을 만족케 하기 위한 목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를 부르실 때에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된 동기는, 그들의
세상적인 필요를 채우고 만족하기 위한 분으로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어부였던 제자들은,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그들을 향해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하시는 기적을 경험했을
때,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야라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배와 그물을 버리고, 심지어 자신의 가족들도 뒤로하고서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사람이지 채우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아프기도하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배도 고플 각오가 된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을 버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 다니는 제자라고 일컬어지는 무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이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으로 나를 찾아 왔는데, 이제는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을 하십시오. 그리고 이 양식을 내가 당신들에게 주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6:51절에,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합니다.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입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영생을 얻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생명의 떡으로 믿고, 그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심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먹고 마신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4장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음식을 가지고와서
드시라고 했을 때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그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먹을 생명의 양식, 영생의 양식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를 부르셔서 세상에 보내시는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고, 그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과 욕심을 따라 살아가게 되면 영생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가
일해야 하는 것은 육적인 양식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을 먹기 위해서 더욱 힘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육신의 삶의 풍요함에만 관심하며 살아간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팬은
될 수 있지만,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향해서, 육이 아니라 영적인 것에
관심하며, 예수님으로부터 영생의 길을 깨닫고,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많은 제자들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누가 들을 수 있느냐”고 반문을 합니다. 그들에게 영적인 생명에 대해서 말할 때에 그들이 그것을 어렵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이 어려워서 누가 그 말씀을 알아듣겠느냐?”라며 수근거리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반문하십니다.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곧 “이 말이 너희로 실족하게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못 알아듣겠다고 수근거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잘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영적인 말씀에 대해서, 그들은 거부반응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예수님은 자신들의 육신의 질병을 고치고, 굶주릴 때 배고프신 분으로만 관심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으로부터 영적인
양식을 먹고 영생하라는 말이 그들 마음속에서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어렵다고 말하는 진짜 이유는 예수님이 설명하시는 것이 어렵다거나, 그들의
이해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영적 말씀을 듣고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어려워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관심거리가 아니고,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 홈페이지에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가 아이에게 청력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해서 상담을 올린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문제의 아이는 어떨 때는 엄마의 말하는 것을 잘 알아듣고 행동하는데, 어떨 때는 엄마가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하고 반응하지 않는 것에 것입니다. 그러니
그 아이가 청각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해서 글을 올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질문에 대한 답변 중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걱정할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고 안심을 시키면서 말하기를,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에게 불리한 상황에 대해서는 못들은 척 해서 이를 피하려고 하는 ‘자기방어적’ 성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스크림 먹어라” 라는 자신이 듣기 좋은 말은 어떤 상황에도 잘 듣는데 “공부해라, 오락 그만해라”라는
말은 잘 안들린 다는 것입니다. 이는 청력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팬과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해 놓은 예수님에
대한 기대와 틀이 있었는데, 그것을 넘어서 영적인 말씀을 하시니까 이를 거부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떠나서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던 유대 제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영생의 축복을 받은 이들이 요한복음 4장에
나옵니다. 바로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땅에 가셨을 때에 제자들은 음식을 구하러 사마리아 마을로 갔고, 예수님은 우물가에 앉으셨다가 물을 길으러 온 한 여인을 만나 대화를 하십니다.
그 때에 그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자신의 마을 사람에게 전할 때에, 사람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님께로 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마을에 유하실 것을 간청을 하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시고 이틀 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한 사마리아
여인을 보고 하는 말이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마을에 들어가셔서 특별한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있으시면서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을 양식으로 그들에게 전하셨고, 그들은 그 영의 양식인 그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 먹었던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고, 굶주린 자신들을 먹여 주셔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은 것이 아닙니다. 이틀 동안 그들은 자신들의 육신이 아니라 영적인 삶에 관심하였고, 예수님을 자신들의 영의 양식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부정하다고 여기면서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지만,
도리어 그 사람들이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며, 어떠한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영생의 복을 얻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썩어질
양식을 위해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일에 관심하며,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생명의 양식인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제자된 성도는
우리의 삶의 관심을 육신적인 일에서 영적인 일로 관심하시며, 주님에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고자 힘써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의 영의 말씀을 거부하고 많은 제자들이 돌아갔을 때에, 예수님은
남아 있는 12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 때에 베드로가 참 멋진 대답을 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예수님의 열두제자들의 관심은 영생에 관한 것이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얻지 못할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의 마음에 거스린다고 떠나지 않았고, 도리어 그 말씀에 자신들을
변화시키고자 힘썼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예수님을 좇아 다니는 많은 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인 것을 기대하면서 따라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 영적인 삶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영적인 변화의 삶을 요구할 때에 그들의 열렬함은 식어버리고 예수님을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팬으로 남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자신의 기호에 맞으면 환호하다가, 자신의
기호에 맞지 않으면 등을 돌리고 떠나버리는 사람들을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팬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영생의 일을 위해서 일할 선수를
원하십니다. 육신의 만족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영의
만족을 위한 일을 위해 살아 가라고 외치는 예수님의 일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9:23절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뜻을 따라 내 자신을 부인하고, 나의 만족과 기대가 아니라, 예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과 한 팀이 되어서 영적인 일을 위해 함께 뛸 선수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육적인 양식과 풍요와는 비교할 수 없는, 더
크고 풍성한 영적인 양식이 주님께로부터 있음을 믿고, 그 영적인 풍성한 은혜를 공급받기 위해서 관심하며
일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셨던 질문을 저와 여러분에게도 하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나의 관심이 예수님께서 관심하시는 것으로부터
멀어지고,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삶이 아니라, 자꾸 내 생각과
만족을 고집하면서 살아가고자 할 때에, 예수님의 물음을 자문하십시오.
“너희도 가려느냐?”
하지만 대답은 다음과 같아야 합니다. 베드로와 같이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으매 어디로 가리이까?” 이 땅에서 영적인 생명과 풍성함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실 양식은 주님으로부터만 공급을 받을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우리의 팬과 같은 마음이 제거되고, 예수님과 함께 영적인 일을 위해서 함께 뛰는 선수와 같은 제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설령 영생의 말씀을 믿고 살아가다가 굶주리고 어려움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육신적인 어떠한 풍요보다 더 귀함을 믿고, 예수님의 팬이 아니라, 예수님을 죽기까지 따를 수 있는 선수와 같은 제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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