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1/2017 -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히브리서 3:7-14] 송년주일
우리는 한해의 마지막 날, 송년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우리의 삶에도 인생의 마지막 날이 있음을 각성하고, 그것을 준비하는 것은 신앙에 커다란 유익이
됩니다. 때로 우리는 이 땅에서의 마지막 날이 먼 미래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사실, 그렇지 않고 바로 지금일 수도 있음을 깨닫고, 준비해야 합니다.
저에게도 이 땅에서의 마지막 날이 언제든지 올 수 있음을 깨닫게 한 사건이
있습니다. 교통사고입니다.
제가 서울에서 신학교 대학원을 다닐 때에, 지방에 있는 교회의 교육전도사로 사역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아버지가 해외 근로자로
중동에 가시기 전에 사 놓으신 티코라는 소형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티코라는 차는 워낙 작고 약해서 사람들이
그 차를 가지고 농담을 많이 했습니다. “티코가 잘 달려가다가 갑자기 멈췄는데 왜 그런지 아니?” 웬지 아십니까? 길바닥에 껌을 밟아서 껌에 붙어서 섰다는 것입니다. 주중에는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주말에는 차를 타고 교회에 내려갔다가 주일 밤이나 월요일 새벽에
서울에 올라왔습니다. 어느 주일 밤에도 여느 때와 같이 모든 일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깜깜한 밤에 산기슭으로 난 커브길을 가고 있는데 갑자기 제 앞에 차 한데가 제 차선을 막고 돌진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차를 추월하려고 제 차선으로 들어온 차였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그
차를 피하려고 산쪽으로 핸들을 돌렸고, 차는 콘크리트 가드래일을 박고 넘어져서 아스팔트 길위를 긁으며 한참을
갔습니다. 그 순간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이대로 가다가 어디에 부딪치거나
떨어지면 그대로 죽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차를 어디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고 멈추게 하셨습니다. 차는 옆으로 넘어져 있었고, 나가는 문이 하늘을 향해 있었습니다. 이제 문을 열고 나가야 하는데 쉽사리 팔을 뻗지 못했습니다.
“내가 문을 열려고 손을 내밀 때에 손이나 몸이 다쳐서 문을 열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팔다리가 다친데가 없었고, 가슴에 멘 안전벨트로 인해서 가슴에 멍이 든 정도였습니다.
그 사고를 경험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 제 삶의 끝이 언제든지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준비가 되던지,
안 되던지 간에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날 저는 매일, 매일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 될 수 있음을 경험했고, 그래서 언제 저에게 이 땅에서의 끝이
온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만나볼 때를 준비하며, 주 뜻대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도, 항상 자신의 삶의 마지막을 염두에 두고 사역했던 사람입니다.
디모데후서
4:7-8a절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세상에서 여러번의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자신의 마지막 모습이 어떠할 지에 대해서 늘 준비하면서 살았습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서,
주님으로 부터 의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보면, 히브리서를 쓴 기자는 믿음의 사람들이 끝까지 붙잡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만,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삶에 있어서 시작과 끝은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참여하다’는 ‘메토코스’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것은 “함께 나누는, 함께 하는 동료”와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함께 하면서 나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도는 예수님과 모든 것을 함께 나누고 참여하는 삶을 시작한 것이고, 그러한 모습으로 끝까지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을 때에 확신한
믿음을 끝까지 견고히 붙잡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해의 마지막 날을 보면서, 올 한해 무엇을 붙잡고 살았는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확실한 믿음을 견고히 잡고,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는 삶을 살았는지, 아니면 예수님이 아니라, 사람을 붙잡고 살고, 세상적인 것들을 붙잡고 살았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시작을 했지만, 그 믿음을 끝까지 붙잡고 지키지 못하면, 예수님과 함께 참여하지 못하는 끔찍한 마지막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주시고, 또한 의의 면류관을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들이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끝까지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지 못한 자의 예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광야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광야생활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차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떠나게 되고, 하나님을 붙잡지 않는 삶을 살게 됩니다. 결국 40년의 광야생활을 지내면서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참여하지 못하는 마지막을 맞이합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견고하게 잡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 이유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완고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면, 우리 인생의 끝을 하나님의 나라에 함께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을 향해서” 마음을 완고하지 말라”고 거듭말하고 있습니다.
8절에도, 13절에도, 15절에도,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완고하다”는 말은 ‘굳게 하다. 굳어지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곧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 마음이 굳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고집대로 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출애굽할 때에 애굽의 왕 바로가 열가지 재앙을 당하며 끝까지 버티다가 나라가
망할지경까지 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서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와 같은 완고한 마음으로 망하기를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완고한 마음을 누끄러뜨리기 위해서 쓰시는 방법이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완고한 마음에서 돌이키게 하시기 위해서 8절에 보니까 시험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 것과 다른 상황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험으로 주셨습니다. 자신들의 생각과 고집대로 되지 않는 상황들을 보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험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리어 자신들을 시험하시는 하나님을 시험을 했습니다.
9절에 보면,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을 순종함으로 통과하지를 않고, 도리어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해 달라고 하나님을 불평하며, 반란을 일으키며, 하나님의 뜻을 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에 끝까지 자신의 완고한 마음을 꺾으려고 하지 않을 때에, 결국 그들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2절에서, ‘우리의 마음이 완고하게 되는 것”은 죄의 유혹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 신념을 붙잡고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불순종하도록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 동안 그들의 바램과 거슬리는 상황들을
주신 것은, 그 완고한 마음을 돌이켜서, 주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광야생활하는 날마다의
삶을 통해서, 그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옥토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와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우리의 마음이 완고해지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나를 가두고 있는 내 자신의 고집스럽고 완고한 마음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보통 동물들이 성장하게 될 때에, 몸의 세포가 분열되어서 몸도 커지면서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동물도 있습니다.
랍스터나 새우와 같은 갑각류는 시간이 지나면 자신들을 보호하고 있는 몸이 굳어져서 더 이상 성장을 하지 않고,
도리어 성장하는 자신들의 몸을 가두는 껍데기가 돼 버립니다. 그러기에 이 갑각류는
성장하기 위해서 딱딱하게 굳어진 그 갑옷과 같은 몸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이 허물을 벗는 과정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자신의 굳은 몸에 갇혀 미성장의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온 힘을 다해 그 굳어진
껍질을 벗겨 버려야 합니다.
성도도 마음 속에 생기는 완고한 껍데기를 수시로 벗어 버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확실히 붙잡고, 그리스도와 끝까지 함께 하기 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완고한 마음을 벗어 버리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완고해 지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에 집착하면서 살아갈 때에
그렇습니다. 그럴 때에 내 마음이 완고하게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변화없고, 성장없는 고집스러운 삶을 살아갑니다.
마음의 완고함을 막을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가, 내 마음의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을 원하시는지, 늘 그 마음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1985년, Charles M.
Sheldon 목사가 교인들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쓴 글이, 그가 죽은 이후에 “In
His Steps” 라는 책으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님을 따라서 살아가는, 실제적인 삶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 도전하였고, 제시하였습니다.
그 책에는 레이몬드 교회가 나오는데, 그 동네에서 가장 큰 교회였고, 그 교회에는 그 지역에서 부유하고, 사회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였습니다. 교인들은 교회생활에 대해서 만족하였고,
자신들의 신앙생활에 별 문제가 없는 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그 전에
가지고 있던 완고한 껍질을 벗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어느 주일에, 그 교회 담임목사인 맥스웰 목사님은 “예수님이 몸으로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대로 살아야 한다.”는 내용의 말씀을 전하고, 설교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듣고, 외지에서 온 한 남루한 복장의 낯선 남자가 의자에서 일어나서 큰 소리를 말합니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죄송하지만, 이 예배가
끝나기 전에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라며 힘이 없어 비틀 거리는 몸으로 마이크 석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듣고서 의문이 생겼다며, 앞에 나와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산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요? 성가대가 “주와 함께 가려네” 라는 찬송가를 불렀는데,
과연 그 뜻은 무엇일까요? 저는 실직한 인쇄공입니다. 실직 이후에 직장을 구하지 못해서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 사이에 내 병든 아내는 약을 구입하지 못해서 치료받지
못하고 죽었고, 교인인 집주인도 아무 상관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내야 했습니다. 이 동네와서 직업을 구하려고 많은 애를 썼지만, 아무도 관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의문이 생겼는데,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한 그 남자는 힘없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맙니다. 목사님과 교우들이 며칠 동안
그 사람을 간호하며 건강이 회복되기를 원했지만 결국 그 남자는 죽고 맙니다.
그의 죽음을 보면서 맥스웰 목사님은 커다란 도전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에 사람을 모집하는 광고를 합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What would Jesus do? ”를 생각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예배 후에 남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기 위해서 기도하고, 그 원하시는대로 살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들은 모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모임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 이후에 그들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고자 기도하며, 그 뜻하신 것을 위해 결단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대로 살아가고자 할 때에, 많은
갈등과 내 자신을 죽이는 번민과 고통이 따랐습니다. 가족과 이웃,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조롱이 있었고, 직장을 스스로 나와야 하는 결단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라는 질문은 모든 기독교인의 질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질문으로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마음에
관심하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이 완고해 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바라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을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말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지 않고, 완고한 인간적인 마음을 품고서 살아가는 마음도 있는데,
12절에 이를 ‘악한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완고한 마음, 악한 마음을 가지고는 우리의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3. 우리가 이 땅에서 끝날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나누는 참여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의 생각과 고집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완고한 마음을 가진 삶을 살았습니다. 문제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완고한 마음으로 사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옳다고 여기는
의를 내세우고, 자신을 높이다가 하나님과 역행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완고하고 악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완고한 마음을 청산해
버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삶을 살았습니다.
빌립보서 2:5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이제 사도바울은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서 살았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서 살아가고자 했지만, 때로는 육신적으로 자신을 자랑하고 내세우는, 완고한 마음이 올라와서 괴로와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날마다 하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15:31절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말합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기 위해서는, 내 자신을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거하시게 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때로는 인간적인 마음으로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힘들어서 고민하며 애통해
하기도 했지만, 날마다 나의 완고한 마음을 깨뜨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이 땅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살 때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2017년도 마지막 주일 오전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우리의 마지막 날까지 어떤
마음을 가지고 누구와 함께 참여하는 삶을 살아야 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이 땅에 살면서 나와 함께 있다고 할지라도, 그 끝날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할 수 없다면 그 인생은 허무한 헛된 인생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부터 예수님의 모든 일에 함께 참여하며 동행하는 삶, 그러다가 그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이 복된 삶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이 완고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생각과 신념으로 굳어진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다가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거역하는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모습과 같이 되기 쉬운 것입니다.
올 한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완고하게 더 굳어진 것은 아닌지, 아니면 주님의 마음을 더 품는 시간이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이제 앞으로 더욱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자 힘쓰는 하루 하루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순종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함께
하심을 체험하는 삶이요, 우리의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귀한 성도의 삶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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