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3/2017 - 그에게 소망을 두라 [로마서 15:12-13] 대림절(1)
이번 주간부터 교회력으로 대림절기 Advent 가 시작됩니다. 대림절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 전 4주간을 말합니다. 대림절은 라틴어 Adventus, 곧 ‘도착’이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도착하셨음을 기념하며, 또한 우리의 삶 가운데 오시기를 기다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오심에 대한 기다림을 표현하는 것이 5개의 대림초입니다. 대림절 주일마다 초 하나씩을 추가로 밝히고, 마지막 성탄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하얀색 초를 밝혀서 주님의 오심을 나타냅니다.
이 대림절의 상징이 된 ‘네 개의 초’는
매 초마다 의미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소망의 초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평화, 세번째는 기쁨, 네번째는 사랑의 초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소망의 초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우리의 소망임을 믿는 믿음의 고백을 가지고 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제 대림절 네 주간동안, 예수님의 탄생 속에 담겨진 소망, 평화, 기쁨, 사랑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첫번째 초의 의미인 소망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올해 10월에, 아마존이라고 하는
대기업이 와싱턴 주, 시애틀에 있는 본사를 이어, 제2의 본사를 미국 내에 세울 계획이 있음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미국의
100여개의 도시가 자신들의 도시에 그 본사를 세워 달라고 Love call 하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도시들이 세금을 감면해 주는 등의 특혜를 제시했습니다. 심지어
도시의 이름을 바꾸겠다는 제안도 나왔습니다. 아리조나주의 피닉스는 도시 이름을 피닉스에서 피닉스 아마조나
로 바꿀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애리조나 투산의 경제개발 단체는 아마존 최고경영자인 제프 베저스에게
높이 21피트의 커다란 선인장을 선물로 보내면서, “아마존도
투산에 오면 이렇게 성장할 수 있다.”는 자신했습니다.
많은 도시들이 아마존 제2의 본사가, 자신의
도시로 오기를 이렇게 열렬히 소망하는데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아마존 본사가 들어오게 되면, 5만명의 일자리를 창출하게 되는데, 이는 세계 올림픽을 유치하는 것과 같은 경제적인 효과라고
합니다. 자신들의 도시에 경제적인 도움이 될 것을 소망하면서, 각
도시들은 아마존이라는 대기업이 자신들의 도시에 와 주기를 그토록 애타게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열방이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둘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이 오셨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소망을 두지 않고 거부했습니다. 때로 예수님이 자신들의
먹을 것을 해결해 주실 것을 기대해서 열렬히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결국 예수님이 자신들이 생각했던
기대에 못 마칠 때에 여지없이 떠나 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바라는 것,
곧 소망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아마존과 같은 먹고 입을 것을 해결해 주는 존재를 소망했지, 집없고 힘없는 젊은 청년을 원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에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두신 소망의 내용과
다른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분들은 주님안에서 소망을 발견하고, 비젼을 가지고 살아가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의 소망으로
보내주셨는지를 살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천년전 이스라엘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소망이 되심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1. 먼저 우리가 깨닫는 것은, 하나님은 예수님께 소망을 두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디림절 첫번째 초를 ‘소망의 초’라고도
하고, ‘예언의 초’라고도 말합니다. 그 이유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메시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의
소망으로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소망이 있었는데 그것은 메시야가 자신들에게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나라가 어렵고 힘들 때에 그 나라를 구해줄 메시야와 같은 인물이 등장하기를 소망하였고, 예언자들도
하나님께서 그 메시야, 구원자를 보내 주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전, 로마의 통치를 받으면서 더욱 커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알지 못하는 이방나라인 로마에 의해서 억압받는 것에 대해서 절망했습니다. 그래서 ‘에세네파’라고
불리는 어떤 유대인들은 로마가 통치하는 지역을 떠나 광야와 같은 곳에 모여 살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젤롯’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무기를 가지고 로마의 통치에 대항을 하기도
했습니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그 절망의 상황을 벗어 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은 이러한 절망 가운데서 더욱 메시야를 소망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메시야를 그토록 고대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렇게 구약에 선포된, 소망의 예언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이루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이사야가 메시야에 대해서 예언하는 모습입니다. “이새의 뿌리, 곧 다윗왕의 자손 중에서, 열방을 다스릴 이가 일어나고,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야는 열방을 다스리시는 통치자로
등장을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비롯한 모든 열방이 예수님께 소망을 두고, 그의 통치를 받을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던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 주셨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야의 모습과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로마의 통치 아래에서 가지는 소망은, 로마를 정복하고 모든 열방을
다시 다스리는 다윗왕과 같은 막강한 구원자가 나타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윗의 모습과는
달랐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다윗과 같이 열방을
통치하는, 그들의 소망을 이룰 만한 존재가 못 되었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마다 다 소망들이 있습니다. 바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다윗과 같은 강력한 힘을 바라기도 하고, 차고 넘치는 부유함을 소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 안에서 소망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렇지 못하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소망, 바램이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사람들이 품기를 원하는 소망은, 모든 만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음으로, 영적인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망은 로마의 식민지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적으로 죄가운데서 죽어가고 있는 것이 절망이었고, 이것은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로마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오늘날 이 땅 가운데의 근본적인 절망은 세상적인 공급이 없고, 부족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약하고, 비천하기에 절망스러운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곤고한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결핍되어서, 영적으로 메말라가고, 죄의 권세가운데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전쟁과 다툼, 미움, 욕심, 거짓된
욕망들이 이 땅을 지배했던 것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한 아들을 둔 가정이 있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졸업기념으로
자동차를 한 대 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입학해서 기숙사로
떠나게 됐는데도 아버지는 자동차를 사주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아버지는 기숙사로 들어가는 아들에게 성경책을
한권 주면서 틈나는대로 성경을 읽으라고 했습니다. 특히 빌립보서
4:19절은 “네 인생에 큰 도움이 될 테니 꼭 펴서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동차를 사주지 않은 아버지에 대해 마음이 뒤틀려서, 아들은 성경책을 구석에 처박아 둔 채 전혀 읽지도 않고 관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만날 때마다 자동차를 사 달라고 졸랐고 그때마다 아버지는 “성경을
읽었느냐? 빌립보서 4:19절을 읽었느냐?” 라고 응수할 뿐 자동차는 사주지 않았읍니다. 대학교 졸업을 하는
날, 부모님은 아들을 축하해 주러 학교에 왔고 아들이 지내던 기숙사에 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이 준 성경책이 어디 있냐고 묻습니다. 그
성경책은 먼지 속에 처 박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성경책을 들어 아들에게 빌립보서 4:19 절을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마지못해 그곳을 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는 말씀과 함께, 그 성경구절이 있는 책사이에는 자동차 한대
값에 해당하는 수표가 들어 있었습니다.
아들의 절망은 자신이 원하는 자동차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아버지가 아들을
바라볼 때에 그 아들이 가져야 할 절망은 자동차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신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영적인 은혜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이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소망 가운데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육신적인 감각의 만족을 위해서 눈과 코와 입과 감각을 즐겁게 하면서 살아가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절망하는데, 정작 우리 영이 절망의 상태에 있음을 모르고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에 대해서 관심할 때에, 나의 육신의 만족을 소망으로 살아가지
않고,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얽매여서 내 영을 만족시키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 땅에 절망스러운 사건들, 전쟁, 테러, 학대, 폭력, 미움, 불의 등이 해결함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의 소망이 되심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절망의 상태를 잘 아시는 분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문제는 잘 못먹고, 못 입고, 인생의 궁핌을 경험함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문제는 자신의 욕망에 사로 잡혀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죽을 길을 걸어가는
영적인 문제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의 소망을 세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두라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는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자신이 통치하지 않고, 주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예수님의 오심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기다리며 주님을 모시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2. 그리고, 주님을
우리의 소망으로 모신 성도와 성도와 교회는, 절망 가운데 있는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가 소망되심을 드러내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미디어에서 들려 오는 교회에 관한 소식을 보면,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소식들이 대부분입니다. 교회와 성도가 이 땅에
소망을 주기보다는 실망을 주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시카고에 있는 “윌로우 크릭 교회”를
담임하는, 빌 하이벨즈(Bill Hybels) 목사님이 한
리더십 세미나(Global Leadership Summit)에서, “각
지역교회는 이 땅의 희망입니다. The local church is the hope of the world” 라는
강연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나눴습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님은 어린 시,절 교회를 다니면서 교회는 “희망이 없는 곳 hopeless” 이라고 여겼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명성에 해를 입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여겼고,
그래서 자신의 남은 생애동안 교회의 일에 깊게 참여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18세가 되었을 때에, 교회에
대한 관점이 희망없는 곳에서, 이 땅의 희망이 있는 곳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학교에서 한 교수로 부터 초대교회의 역사에 관한 수업을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초대교회 사람들을 움직이셔서 사용하셨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수는 이렇게 도전했습니다. “왜 이 교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초대교인들이 했던 것과 같이
당신들의 삶의 계획과 삶을 교회를 세우는데 드릴 수 없을까요?”
그 이후 빌 하이벨스 목사는 이 땅에 희망은 정부나 학교, 기업이 아니라, 교회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삶과 마음을 진정으로
바꾸는 구원의 메시지를 교회에 맡겨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로 빌 하이벨스 목사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이 땅에 세워지기를 소망하는 비젼을 가지고 자신의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서 애썼다고 합니다.
예수님께 소망을 두니까, 비젼이 생기고, 사회에
소망을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소망이 될 수 있는 것은 교회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시지와 능력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고, 그의 말씀대로 다스림을 받는다면, 악의
절망 가운데 있는 이 땅 가운데, 또한 우리 가정, 자녀들, 이 사회에 진정한 소망을 드러내는 성도와 교회로 온전하게 서는 줄로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을 보면서 절망할지 모르지만, 교회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며, 그 소망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세계 제2차 대전 때에, 전쟁 포로가
갇혀 있던, 독일 쾰른지방의 어느 건물의 지하실 벽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 햇빛을
볼 수 없을 때에도,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는다. 비록 내가
홀로 고독하게 살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 비록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 때에라도, 나는 하나님을 굳게 믿는다."
우리가 감옥과 같은 절망의 상태에 있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존재하시고,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우리의 가정이, 이 사회가 소망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인 절망의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결해 주셔서 천국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우리 삶의 소망을 예수님께 두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아마존이 우리의 소망이 아닙니다. 돈이 우리의 소망이 아닙니다. 김정은과 핵이 북한의 소망이 아니듯이 그 어떤 통치자도 우리의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교회의 소망은 목사도 아니요, 우리 자신들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십니다.
예수님께 소망을 둔다는 것은, 곧 모든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통치가 이땅에 이루어질 때, 절망이
산재한 이 땅에 소망이 있음을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대림절 기간에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셔서 천국의 소망을 주신 구원의 기쁨이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서, 이 땅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진정한 소망이 되심을 드러내는 희망있는 교회, 성도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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