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9/2018 - 내 안에 누가 사는가? [갈라디아서 2:20]
어릴 때에 밖에서 정신없이 놀다 보면,
‘그만 놀고 저녁 먹으라’고 어머니께서 부르실 때가 있습니다. 놀 때는 몰랐는데 집에 들어가 밥상을 보면 허기가 몰려
옵니다. 그러면 밥을 허겁지겁 먹게 되는데 그 때 종종 어머니께서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혁이야, 체하겠다. 뱃속에
걸신이라도 들어 앉았냐? 천천히 먹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 걸신이 뭔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빌어먹는 귀신’이라는 뜻이더라구요. 개걸스럽게 먹는 제 모습이 마치 빌어 먹는 귀신이
먹는 모습과 같아 보였을 것입니다.
사람 안에는 걸신만 들어 앉아 있는게 아닙니다. 때로는 ‘도둑놈’이 들어
앉아 있을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 중에 자신은 손해 안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얻어 볼까하고
탐하는 모습을 보면, “저런 도둑놈 심보 보소…”라고 말합니다. 도둑놈과 같은 마음이 그 사람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사도바울은 자신 안에 누가 살고 있는지를 고백합니다. 바로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 안에는 예수님께서 계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삶의 전적인 변화가 있게 됩니다. 평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변화는 단순한 외적인 변화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내적인 변화에 기인합니다. 바로 바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시는 내적인 변화가 있게 되니, 외적인
변화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가지는 삶의 변화도, 사도바울과
같이, ‘내 안에 예수가 살아 계신다’는 내적인 변화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내 자신이 살아서 역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안에 누가 살고 있습니까? 어떻게
사도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는 비결을 보면 의외로 간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게 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내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그것도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아 죽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처음부터 예수님이 자신 안에 사는 믿음의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바울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없는 삶을 살았을 뿐 아니라 예수님과는 적대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에게 그러한 변화가 나타난 원인 중에 하나가 바로 십자가에
대한 이해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동안 십자가를 혐오했습니다.
그 당시에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사람은 예수님 만이 아니었습니다.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바울은 그들의 죽음이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십자가 형은 로마제국이 죄가 심한 사람을 사형하기 위해서 도입한 사형 도구입니다. 그리고 시시한 죄를 지은 사람들은 십자가형을 내리지 않습니다. 아주
중한 죄를 지은 사람들이 십자가형을 받습니다. 로마가 커다란 제국을 이루면서 식민지 나라에 대해서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강력하게 다루었던 것은 로마에 대항하는 세력들이었습니다. 독립을 위해서 로마에 맞서는 사람들을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보았고 그러한 자들에 대한 처형도 끔찍했습니다. 로마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십자가형을 내렸습니다. 또한 아주 비도덕적이거나
끔찍한 죄를 범한 사람들에게도 십자가형을 내렸습니다. 그러니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죄질이 나쁜 사람이라고 인식되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를 볼 때에도 꼭 그러했습니다. 예수는 마땅히 죽어야 하는 위험인물이었고 죄인이었습니다. 예수의
세력이 커지게 되면 로마인들이 이를 위협적으로 생각해서 유대인들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대교에서 볼 때에 예수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무시하고 안식일을
범하고, 자신이 마치 하나님 인양 판단하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며 사랑으로 품는 모습이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뿐만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도 예수와 같이 십자가에서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에
열심을 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바울이 기독교인들을 잡아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빛
가운데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할 존재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되니 자신이 죄인인 것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그것도 죄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할 정도로 심각한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자신은 십자가의 죽음과 상관없는 의로운 자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옛 바울과 같이 스스로의 의를 가지고 다른 이들을 정죄하며 교만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7:21-22-23에서, 예수님이 없는 사람 안에는 어떠한 것들이 그 안에 있는지
말씀해 주십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도둑의 모습도 있습니다. 내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하며 갖고 싶어합니다. 살인자의 마음도 있습니다. 나를
괴롭히고 미워하는 사람을 보면서 ‘귀신은 저런 사람 안 데려가고 뭐하나?’ 하는 살인자의 마음도 있습니다. 간음하는 자의 모습도 있습니다. 자신의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성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사기꾼도 자리 잡고 있어서 다른 사람을 속이고 자신의 유익을 취하려고도
합니다. 쾌락을 따라서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하는 바탕한 모습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질투하는 모습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자의 모습도 있습니다. 교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우매함도 있습니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나의 모습들도 있습니다. 이곳에 어린이와 학생들도 있지만, 이들
속에서도 이러한 악한 생각과 마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아이들도 욕심이 있고, 질투가 있습니다. 내것도 아닌데 슬쩍가져 오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외적으로 깨끗한 척 하면서 살아가지만, 예수님은 그들 안에 더러운 죄의 내용들이 그득하게 있음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자신이 정말 의롭고 깨끗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죄인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할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다음에 그가 한 일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우리도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사시는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 주셔서
구원에 이르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주신다고
해서 실제로 완전한 의의 사람으로 변화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대가를
치르심으로, 우리는 더 이상 죄로 인해서 정죄를 당하여 지옥에 가지 않고, 구원에 이르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았지만, 저와 여러분은 여전히 죄성을 가지고 늘 죄 가운데 살아가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구원에 이를 의를 이루어 주셨지만, 이제
그것을 믿는 자들의 과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 실제적인 의를 이루는 거룩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을 때에 가장 먼저 죽여야 할 존재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입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다는 것이고, 그런 자신의 죄된 모습을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내가 죄인임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을 때에,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죄를
짓고자 하는 나 자신을 죽여서 나를 죄에 대해서 반응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3. 이제 나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나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십자가를 볼 때에 자신의 죄성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죄만을 본 것이 아니라, 그 죄인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말할 때에,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자신을 사랑하셔서 죽으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을 할 때에 사도바울은 어느 사람보다 감격스러웠을 것이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자신은 예수님과 그의 교회를 핍박하는데 최고의 선봉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 어떤 사람들보다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을 저주했던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도 그러한 바울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적하는 죄인된 자신을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사건임을 고백합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다른 사람을 위한 죽음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여기 계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셨고, 예수님은
여기 계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서,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죽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서 자신을 버릴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죄인들을 사랑해 줄 사람도 없고, 더군다나
죄인을 사랑해서 죽어줄 만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4.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다는 증거의 삶이 있는데 바로 그것은
사랑입니다. 나를 위해서 죽으신 사랑의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사시기 때문에, 나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사랑해서 내 자신을 내어 놓는 예수님의 사랑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고
증거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아직도 내 자신이 살아서 예수님을 내 안에서 죽이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제 뜻대로 좀 하고 싶으니 예수님은 좀 죽어 계십시오.” 라며 우리 자신이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을 내 안에서 살게 하는 일은 단번에
일어나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도바울도 자신은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신다고 고백을 하지만
그것이 날마다 이루어져야 하는 일임을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31절에, 고린도교인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죽고 예수가 내 안에 사는 일은 단 한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매일, 매시간, 매 순간 마다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내 자신을 죽이는
일에 힘을 쓸 때에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나시고, 내 삶을 가득 채우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내 안에 온전히
살아계실 때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통해서 온전히 드러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이 더 이상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의 삶은 자신의 삶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 대치 되는 것입니다. 이제
자신도 예수님과 같이 죄인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서 대신 죽을 수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전에는
기독교인을 박해하며 죽이는 일을 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내 자신을 죽이고, 다른 이들을 살리는 예수님의 모습이 사도바울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에 가장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 사랑입니다. 바울과 같이 죄인된 사람들을 정죄하고 박해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죄인을 살아하여서 자신을 죽이는 일을 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살아계시면 사랑과 생명에
관심하게 되고, 나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생명이 드러나는 삶을 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나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느껴지고,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살아나는 역사가 나타난다면 분명 당신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람안에는 여러가지 다중적인 인물들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여러가지 성품을 가진 인물들이 부각되어 나옵니다. 헐크와
같이 보통 때는 착하고 온순해 보이지만 화가 나면 분노와 파과의 사람이 돌출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들은 죄의 성품을 가진 죄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죄인이 예수를 믿을 때에 변화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죄인된 내가 내 안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가 날마다 죽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뜻대로 살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어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정작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야 할 존재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죄인된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 비로소 나를 사랑하사 자신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살아서 역사하는 줄로 믿습니다. 다른 이들을 정죄하며 죽이는 죄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역사가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우리 모두 안에 죄인된 우리 자신은 날마다 죽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살아나기를 원합니다. 사도바울과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라는
믿음의 고백이 우리가운데도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내 안에 사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각자와 우리 교회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고, 그리스도의 구원과 생명의 역사가
넘쳐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 안에는 음란한 내가 있습니다. 사람을 볼 때 성적으로 즐기려고 하는 음란한 모습이
있습니다. 그래서 음란한 인터넷 사이트의 유혹에 끌리고, 음란한
생각에 빠져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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