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4/2018 - 하나님과 동행하기 [창세기 6:5-12]
사람들이 세상을 보면서 점점 악해져 간다고 걱정을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이러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하면 악에 물들지 않고, 선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관심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창조 이래로 가장 악했던 때를 들자면 노아가 살았던 시대라고 여겨집니다. 하나님께서 그 때의 사람들을 보시면서 탄식하시고 근심하셨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에 모든 생각이 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의 중심까지도 아시는 분인데 하나님께서 자신이 지으신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 죄악이 가득함을 보시고, 탄식하시며
근심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탄식하심은, 하나님께서
처음에 창조를 지으셨을 때에 모습과는 대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한숨지으시며 탄식했던 모습이 없으셨습니다. 도리어 천지를 만드시는 6일 동안,
매일 매일 만드신 것을 보시고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날에는 6일 동안 지어 놓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서는,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모습이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죄악이 사람들 가운데서 퍼져가면서, 창조의 아름다움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노아시대 때에 가서,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님이 좋아하실
만한 존재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완전히 타락하여서 하나님의 탄식과 근심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탄식하게 하는 죄인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멸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함을 보시고, 그 지으신 모든 것을 쓸어 버리기로 작성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멋지게 즐겁게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우리
안에 있는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 결국은 죽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사람의 눈을 의식하면서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시선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외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 보시기에 좋아하시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상을 멸망하시기로 작정하셨을 때에, 하나님의 눈에 보시기에 좋았던 인물이 있었습니다. 깜깜한 밤에 별과
같이 빛나는 존재가 있었는데 바로 노아였습니다. 노아는 그나마 하나님의 위로가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원래 노아라고 하는 이름은 ‘위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창세기
5:29절에, 노아의 아버지 라멕이 노아를 낳아 놓고 이름을 지을 때에 이러한 말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라고 합니다. 아담의 죄로인해서 이 땅에서 노동하면서 수고하는데, ‘너가 우리의 위로가 된다.’ 라는 의미로 라멕은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고 지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아버지 라멕에게도
위로가 될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위로가 되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은혜를 입혀주셨습니다. 세상을 물로 심판할 때에 하나님은 노아를 살려 주셨고, 그를 통해서
다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시고자 하셨습니다. 노아는 죄악으로 멸망받는 시대에, 은혜를 입어 구원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죄악이 만연한 시대가운데서 하나님께 은혜받은 자로, 어떻게
노아와 같이 구원의 삶을 살아가야 할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특별히 은혜를 베푸신 것은, 노아가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이러한 모습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다른 세상 사람들은 악함가운데 있었는데, 노아만은 의롭고 완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노아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의롭고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는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동행하다는
‘할라크 halak’라는 단어는 ‘같이 걷다. 교제하다.’등의
뜻이 있습니다. 노아는 누구보다 하나님과 함께 걸어감으로 의롭고 완전한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의롭고 완전하다는 묘사는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묘사할 때에 쓰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불의가 없으신 의로우신 분이시며, 또한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람인 노아가 의롭고 완전한 존재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의 의로움과 완전하신 모습을
닮아갔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함께 동행하는 사람에 의해서 영향력을 받습니다. 아무리 착한 사람도 악한 사람과 동행하다가 보면 악해지게 마련입니다. 악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착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다가 보면 착한 사람으로 바꾸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변화가 없을 수 없습니다. 노아가 의롭고 완전한 사람으로 은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노아 자신의 성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과의 동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노아가 하나님과의 동행에
관심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었던 것은, 노아의 조상의 좋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하나님과
처음으로 동행한 인물로 에녹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한 첫번째 사람이었고, 하나님은 그러한 에녹을 데리고 가셔서 이 땅에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에녹은 노아의 증조할아버지입니다.
이미 노아 이전에 그 가문에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 있었고, 노아에게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귀중한 가치가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관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고자 관심하며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도
어떤 사람과 연결시켜주려고 하는 것보다도, 하나님과 연결시켜 주셔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 양육하는 것이, 후손들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없었을 때에, 노아만이 유일하게 하나님과 함께 동행함으로, 은혜로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2. 그렇다면 노아가 어떻게 살았기에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증거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방주를 지은 일로 확증됩니다. 창세기 7:5절에 방주를 다
지은 노아에 대해서 말하기를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다 준행하는 모습이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증거입니다. 노아가 그 당시의 사람들과 달랐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말씀으로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하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살기에 바빴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계획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기에, 모든 것이 악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만큼은 달랐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며 그 말씀을 듣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의롭고 완전하게 되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대로 순종해서 행했던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모든 사람이 행동으로 순종하지는 않습니다. 그 말씀에 대해서 믿음이 있을 때에만 순종할 수 있습니다. 노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인 진리라는 믿음과 확신이 있었습니다. 비록 사람의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산위를 덮으실 정도로 홍수를 내리실 수 있는 분임을 노아는 믿고, 방주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의 소리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강하고 큰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소리보다 불신앙의 소리가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성도들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극복해야 했던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사람들의 소리였습니다. 방주를 짓는 노아를 보고 사람들은 말했을 것입니다. “방주를 산위에다가 짓다니 너 제정신이냐? 지을려면 좀 작게짓게
그렇게 짓다가는 평생 못짓겠다.” 라며 세상적인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노아의 믿음을 흔들어 놓는 세상적인 소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세상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노아는 하나님과 함께 걷기로 작정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도 노아와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고자 하지만 때로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것들과도 동행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도 없고, 하나님과 물질을 동시에 섬길수도 없는데 이를 병행하고자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동행을 거부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려고 할 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에 관심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걷다가 보면 하나님과의 동행에
방해받기가 십상입니다. 시편 1편에서, “복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다.”라고 말씀해 주시는데,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복을 받지 못할 사람들과 함께 하지 말것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함께 동행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분별하고 그 영향력을 받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노아에게도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데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노아가 이러한 사람들과 동행하기를 즐겨했다면, 결국 노아도 그들과 함께 멸망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 간과하지 말아야 할 존재가 사탄입니다. 사탄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동행을 싫어하고 방해하는 존재입니다. 사탄은
노아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동행을 거부하고 죄악가운데서 멸망당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 말씀에
대해 의심을 가지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걸어 갈 수 없도록 삶을 분주하게 만들고, 다른 관심거리를 가지고 옵니다. 하나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을 주어서
하나님과의 동행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또한 함께 믿음생활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불편하게 해서, 믿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하나님과의 동행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켜 나가는 것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3. 그런데 하나님과의 동행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공원에 가면, 산책을 하며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부부나 친구끼리 손을 잡고
보폭을 맞추면서 걷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함께 온 부모는 아이와 함께 걸을 때에, 자신의 걸음에 아이를 맞추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이와 같이 보폭을
작게 해서 함께 걸어갑니다. 그리고 필요하면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서 어깨에 태우고 함께 가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대단한 믿음의 일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유한하고 부족한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허락과 사랑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동행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죄인된 사람들과 동행하시며 함께 하시기를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동행하시기를 원하시는 강한 의지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고, 그리고 제자들과 동행하시는 모습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행하기에 여러모로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믿음도 그렇게 좋지 않았고, 이해력도 떨어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왜 이렇게 믿음이 없느냐고 책망하신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가르쳐 주시면 잘 이해해야 하는데, 그것을 꼭 설명해 주셔야지만 겨우 알아듣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갔던 제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에 승천하실 때에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면서 주님이 영원토록 그들과 동행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중요한 것은 그 동행이 이 땅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어 천국에 가서도 영원토록 있게 될 동행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과의 동행도 영생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동행은 천국에서의 영생을 보장해
줍니다. 그 가치를 알 때에 하나님과의 동행은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권이요,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 구원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살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어느덧 의롭고 완전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 땅에서 그 동안 많은 사람들과 동행하는 삶을 사셨겠지만, 그 누구와의 동행하는 것보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람과의
동행은 이 땅에 한시적인 즐거움과 유익이 있지만, 하나님과의 동행은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영생의 축복을 누리게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데 열심을 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읽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들은 말씀을 가지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행할 때에,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함께 동행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끝까지 동행하기 위해서는,
그 동행을 방해하는 사탄의 계략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하고,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과 상황들이 생길 때에,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에 경청하며,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분주하면
분주할 수도록 더욱 하나님앞에 나와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기를 힘쓰셨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또한 서로에게 좋은 믿음의 동행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가족, 교우들, 또한 이웃들이 하나님과 잘
동행할 수 있도록 격려하며 함께 보조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세상이 영적으로
더욱 어두워져가고 악해져 가는 이 때에, 하나님의 탄식과 근심이 더해져 가는 이 때에,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영생의 축복을 늘
누리면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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