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25 09:18
09/23/2018 - 위로부터의 지혜를 보이라 [야고보서 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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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솝의 우화 중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사자와 나귀, 그리고 여우가 함께 사냥을 나갔습니다. 서로 협력해서 사냥을 했는데 사냥한 것을 앞에 놓고 사자가 말합니다. "자, 우리 셋이 협력해서 이것을 얻었으니 이제 이것을 나누어 먹자." 그리고 사자는 나귀에게 그 잡은 것을 분배하라고 했습니다. 나귀는 사냥한 그것을 공정하게 삼등분해서 분배했습니다. 그것을 본 사자는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내가 명색이 사자인데 나를 너희 둘과 똑같이 취급해? 몹쓸 놈 같으니라고!" 화가 난 사자는 그 자리에서 나귀를 잡아 먹어 버렸습니다.
이제 사자하고 여우만 남았습니다. 사자는 여우에게 "이제 네가 분배하여라"하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여우는 사양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나누다니요. 그러실 필요 없으십니다. 사자님께서 다 잡수시고 남기시면 그것을 제가 먹어야지요."
지혜로운 여우입니다. 괜히 사자앞에서 자신의 몫을 주장하다가 목숨을 잃는 것보다, 사자에게 양보하고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지혜롭다는 것을 아는 여우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 지혜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보다 지혜롭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들입니다.
오늘 말씀에, 야고보는 이 편지를 읽는 교인들에게 묻습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지혜라고 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 있어서 행할 바를 제대로 판단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리고 총명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떠한 상황이 일어났을 때에 그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바른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혜는 우리의 삶의 전영역을 통해서 필요합니다. 말한마디 하는데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돈을 버는데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돈을 벌겠다고 거짓되고 불의한 방법으로 버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공부를 할 때도 지혜롭게 해야 공부를 잘할 수 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모든 삶속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야고보는 특별히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필요한 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관계에 관한 지혜는 그 어떤 지혜보다도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관계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남여간의 관계속에서 태어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태어난 그 이후에도 살아가면서 수 많은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가족과의 관계, 친구들과의 관계, 교회안에서 성도간의 관계, 직장에서의 관계 등이 있습니다. 관계가 없어보이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관계없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관계입니다. 사람은 관계로부터 시작해서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다가 관계속에서 죽게 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과의 관계를 지혜롭게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야고보는 이러한 관계에 있어서 지혜의 행함을 보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지혜로운 관계속에서 살도록 하기 위해서,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1. 먼저 성도가 보여야 할 지혜는 위로부터 오는 지혜여야 합니다.
야고보는 지혜를 말할 때에,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위로부터 온 지혜는 곧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반대로 위로부터 오지 않은 지혜가 있습니다. 야고보는 그러한 지혜를 15절에 말하기를 “땅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하늘로부터 온 지혜와 비교할 때에 극히 제한적이고 부족합니다. 세상의 지혜는 땅위의 것에 관한 것이기에 하늘의 것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세상의 지혜는 육신적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는 깨닫지 못합니다. 세상적인 지혜는 귀신적이기 때문에, 거룩한 영이 주시는 지혜를 알 수가 없습니다.
성도들이 행함으로 보여야 할 지혜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온 하나님의 지혜가 되어야 합니다. 온전한 지혜는 이 세상에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올 때에 그것이 참 지혜요 온전한 지혜입니다.
그래서 잠언 9:10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하늘의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알아감으로 우리 가운데 주어지는 것이지, 세상을 잘 안다고 해서 참된 지혜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지혜롭다고 해서 다 같은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와 세상으로부터 난 지혜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어찌 위로부터 온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혜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로부터의 지혜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게 보이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고린도전서 2:14절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지혜는 육에 속한 사람, 세상에 속한 사람에게는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세상에서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들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가장 어리석은 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여기는, 하늘의 지혜를 구하며 행하는 사람이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그렇다면 하늘의 지혜가 아니라, 이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 관계를 맺어나갈 때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야고보는, 이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계는, 시기와 다툼을 야기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기와 다툼은 결국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을 불러 일으킵니다. 만약 우리의 행함속에 시기와 다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가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세상적인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다가 시기와 다툼속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형제인 가인과 아벨이 나옵니다. 그 둘은 하나님께 함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동생인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형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가인의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가 있으신데도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동생을 시기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결국 가인은 동생 아벨을 들판에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가인이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행동하였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지 않고, 육신적인 생각에 사로 잡혔을 때에 시기와 다툼이 일어나고, 결국 악한 일을 저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는 서로 시기하며 다투는 모습으로 만연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더 높아지고 강해져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잘나 보이고 인정받는 것 같으면 시기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나보다 외모가 더 이쁘고 멋진 사람을 보더라도 시기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다가 다툼이 일어납니다. 일단 다툼이 일어나게 되면 서로를 해하기 위해서 더욱 악한 일들을 하게 마련입니다.
시기와 다툼은 위로부터난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행함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은 우리의 삶속에서 시기와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 삶을 살아가도록 힘써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성도들이 서로의 관계속에서 드러내야 할 위로부터 난 지혜의 행함은 따로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몇가지로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3가지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째,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합니다.
성결하다고 하는 것은 순수하여 악한 동기나 태도를 가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들의 관계를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만들고 유지해 나갑니다.
성결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이고, 곧 하나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거짓없는 성결한 상태로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들이 성결한 모습으로 서로 관계하기를 원하십니다.
반면에 세상에 속한 지혜는 성결하지 않고, 14절에 보니까 거짓됩니다.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거짓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아니라, 사탄의 성품입니다. 속에는 악한 마음을 품고서도, 겉으로는 선한 존재인 양 거짓으로 속이는 것이 사탄의 성품이고, 이를 닮은 것이 세상의 지혜입니다.
우리가 지혜롭게 행하기 위해서는 성결함을 잘 유지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살아갈 때에 적당하게 거짓말도 해가며, 융통성있게 살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성결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것은 순진하다며 어리석은 것으로 취급합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보이기에 성결한 모습이 어리석어 보이는지 모르지만, 하나님보시기에는 지혜로운 자의 모습입니다.
마태복음 5:8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이 땅과 육신에 속한 사람을 바라보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며 만나기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은, 성결한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 사람들과 살아가다가, 하나님까지 보게 되는 사람인 것입니다.
2) 그리고, 위로부터 난 지혜는 화평한다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시기와 다툼은 하늘로부터 난 지혜의 모습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위로부터 난 지혜는 화평입니다.
잠언 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에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면서 풍요하게 살고자 애를 쓰지만, 부부나 가족과의 관계가 좋지 못해서 다투며 불화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지혜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잘 먹고 풍요하게 사는 것보다, 화목한 관계를 맺고서 살아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우선시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화평하고자 하는 것은 하늘의 지혜를 가진 자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된 저와 여러분들과 화평하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 가장 큰 희생을 치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과 죄인들을 화목케 하시기 위해서 자원함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평하기 위해서 힘쓰셨고, 그러기에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들입니다.
하지만, 화평한 인간관계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할 때에 화평을 이룰 수 있는지를 구하며 살아갈 때에 그 화평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6:28-2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네 이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저주하고, 모욕하고, 뺨을 치고, 겉옷을 뺏는 사람과 화평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이 상황에서, “멍청하게 왜 당하고만 있냐? 그러한 사람은 멱살을 잡고 본 때를 보여줘야 한다.” 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이들과 다투지 않고 화평하는 지혜의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은 상대방을 위해 축복하고, 기도하고, 다른 뺨도 때리라고 돌려주고, 속옷도 내어 주라고 하십니다. 어리석어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평화를 사랑하는 Peace maker 를 지혜롭다고 하시지, 매사에 다툼을 불러 일으키는 Trouble maker 를 지혜롭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화평하기 위해서, 때로 다른 뺨까지 내어 줄 수 있는 사람이 하늘의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관용한다고 했습니다. 관용이라는 뜻은 ‘온화한, 너그러운’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사도바울은 빌립보교인들에게 서로를 너그럽게 대해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가까이 오시면서 나타나는 현상가운데 하나는 관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 세상 가운데 관용을 보시를 원하시니, 관용하라고 합니다.
수도사인 성 프랜시스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산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프랜시스와 제자들이 모두 외출한 상태였고, 한 소년만이 혼자 남아서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때 악명 높은 산적 셋이 집을 찾아왔습니다. 그 도적을 본 소년은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용기를 다하여 큰소리로 호통을 쳤습니다. “남들은 땀 흘려 일하는데 너희들은 남의 것을 훔쳐 먹으려는 것이냐!” 도적들은 마음이 찔렸는지 그대로 돌아갔습니다. 프랜시스가 오자 이 소년은 자랑스러운 듯이, 자신이 도적들을 호통쳐서 보낸 일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프랜시스가 말을 합니다.
“그건 네가 실수했다. 지금 곧 도적들에게 가서 이 빵과 포도즙을 주고 오너라.” 소년은 스승, 프랜시스의 말대로 그들을 바로 쫓아가서 빵과 포도즙이 든 선물을 전달했는데, 그들은 그것을 먹지 않고 소년을 따라 수도원으로 왔으며, 회개하고 프랜시스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프랜시스는 도적까지도 관용하며 대하는 지혜가 있었고, 그 관용이 사람을 변화시켰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대하는 사람에 대해서 적대심을 가지고 대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설령 화를 나게 하는 상황이라도 참고 인내하며 관용으로 대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관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기 맘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진노로 대하지 않으시고, 관용하며 사랑으로 대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관용을 베푸신 하나님은, 또한 다른 이들에게 관용하는 것이 지혜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관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때로 가깝고 편한 사이일수록 관용하지 못하고 화를 내며 살아가기 쉽습니다. 집 밖에서는 젠틀맨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집안 사람에게는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관용하지 못하고, 적대시하며 살아가기 쉽습니다.
한국에, 이혼율이 높아지고 있는 20-30대가 이혼하는 가장 큰 이유가 성격차이라고 합니다. 서로의 차이에 대해서 관용하지 못하고 다투다가 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의 관용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나와 연령이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나라가 다른 이들 일수록 더욱 관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관용하지 못하면 서로의 관계가 멀어지고 헤어지지만, 서로 관용할 때에 더욱 긴밀한 관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위로부터 나온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가지고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참 지혜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어리석은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저와 여러분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입니다. 그래서 위로부터의 지혜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는 하나님과 같이 성결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순수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갑니다. 거짓된 세상에서 거짓없는 성결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지혜는 하나님과 같이 화평하는 것입니다. 평화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지혜입니다. 다툼이 있는 곳에서도 평화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지혜는 하나님과 같이 관용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상대할 때에 너그럽게 받아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지혜는 위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또한 하나님의 성품이기도 한 것입니다. 결국 지혜롭게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간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1: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성결하기 위해, 화평하기 위해, 관용하기 위해서 늘 하나님께 그 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행하십시오.
우리의 행함을 통해서, 하늘의 신령한 지혜가 우리 가정과 교회, 또한 이 땅에 온전히 드러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제 사자하고 여우만 남았습니다. 사자는 여우에게 "이제 네가 분배하여라"하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여우는 사양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나누다니요. 그러실 필요 없으십니다. 사자님께서 다 잡수시고 남기시면 그것을 제가 먹어야지요."
지혜로운 여우입니다. 괜히 사자앞에서 자신의 몫을 주장하다가 목숨을 잃는 것보다, 사자에게 양보하고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지혜롭다는 것을 아는 여우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 지혜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보다 지혜롭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들입니다.
오늘 말씀에, 야고보는 이 편지를 읽는 교인들에게 묻습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지혜라고 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 있어서 행할 바를 제대로 판단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리고 총명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떠한 상황이 일어났을 때에 그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바른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혜는 우리의 삶의 전영역을 통해서 필요합니다. 말한마디 하는데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돈을 버는데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돈을 벌겠다고 거짓되고 불의한 방법으로 버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공부를 할 때도 지혜롭게 해야 공부를 잘할 수 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모든 삶속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야고보는 특별히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필요한 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관계에 관한 지혜는 그 어떤 지혜보다도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관계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남여간의 관계속에서 태어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태어난 그 이후에도 살아가면서 수 많은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가족과의 관계, 친구들과의 관계, 교회안에서 성도간의 관계, 직장에서의 관계 등이 있습니다. 관계가 없어보이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관계없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관계입니다. 사람은 관계로부터 시작해서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다가 관계속에서 죽게 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과의 관계를 지혜롭게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야고보는 이러한 관계에 있어서 지혜의 행함을 보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지혜로운 관계속에서 살도록 하기 위해서,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1. 먼저 성도가 보여야 할 지혜는 위로부터 오는 지혜여야 합니다.
야고보는 지혜를 말할 때에,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위로부터 온 지혜는 곧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반대로 위로부터 오지 않은 지혜가 있습니다. 야고보는 그러한 지혜를 15절에 말하기를 “땅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하늘로부터 온 지혜와 비교할 때에 극히 제한적이고 부족합니다. 세상의 지혜는 땅위의 것에 관한 것이기에 하늘의 것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세상의 지혜는 육신적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는 깨닫지 못합니다. 세상적인 지혜는 귀신적이기 때문에, 거룩한 영이 주시는 지혜를 알 수가 없습니다.
성도들이 행함으로 보여야 할 지혜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온 하나님의 지혜가 되어야 합니다. 온전한 지혜는 이 세상에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올 때에 그것이 참 지혜요 온전한 지혜입니다.
그래서 잠언 9:10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하늘의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알아감으로 우리 가운데 주어지는 것이지, 세상을 잘 안다고 해서 참된 지혜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지혜롭다고 해서 다 같은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와 세상으로부터 난 지혜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어찌 위로부터 온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혜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로부터의 지혜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게 보이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고린도전서 2:14절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지혜는 육에 속한 사람, 세상에 속한 사람에게는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세상에서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들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가장 어리석은 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여기는, 하늘의 지혜를 구하며 행하는 사람이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그렇다면 하늘의 지혜가 아니라, 이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 관계를 맺어나갈 때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야고보는, 이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계는, 시기와 다툼을 야기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기와 다툼은 결국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을 불러 일으킵니다. 만약 우리의 행함속에 시기와 다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가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세상적인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다가 시기와 다툼속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형제인 가인과 아벨이 나옵니다. 그 둘은 하나님께 함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동생인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형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가인의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가 있으신데도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동생을 시기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결국 가인은 동생 아벨을 들판에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가인이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행동하였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지 않고, 육신적인 생각에 사로 잡혔을 때에 시기와 다툼이 일어나고, 결국 악한 일을 저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는 서로 시기하며 다투는 모습으로 만연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더 높아지고 강해져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잘나 보이고 인정받는 것 같으면 시기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나보다 외모가 더 이쁘고 멋진 사람을 보더라도 시기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다가 다툼이 일어납니다. 일단 다툼이 일어나게 되면 서로를 해하기 위해서 더욱 악한 일들을 하게 마련입니다.
시기와 다툼은 위로부터난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행함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은 우리의 삶속에서 시기와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 삶을 살아가도록 힘써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성도들이 서로의 관계속에서 드러내야 할 위로부터 난 지혜의 행함은 따로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몇가지로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3가지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째,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합니다.
성결하다고 하는 것은 순수하여 악한 동기나 태도를 가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들의 관계를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만들고 유지해 나갑니다.
성결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이고, 곧 하나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거짓없는 성결한 상태로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들이 성결한 모습으로 서로 관계하기를 원하십니다.
반면에 세상에 속한 지혜는 성결하지 않고, 14절에 보니까 거짓됩니다.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거짓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아니라, 사탄의 성품입니다. 속에는 악한 마음을 품고서도, 겉으로는 선한 존재인 양 거짓으로 속이는 것이 사탄의 성품이고, 이를 닮은 것이 세상의 지혜입니다.
우리가 지혜롭게 행하기 위해서는 성결함을 잘 유지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살아갈 때에 적당하게 거짓말도 해가며, 융통성있게 살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성결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것은 순진하다며 어리석은 것으로 취급합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보이기에 성결한 모습이 어리석어 보이는지 모르지만, 하나님보시기에는 지혜로운 자의 모습입니다.
마태복음 5:8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이 땅과 육신에 속한 사람을 바라보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며 만나기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은, 성결한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 사람들과 살아가다가, 하나님까지 보게 되는 사람인 것입니다.
2) 그리고, 위로부터 난 지혜는 화평한다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시기와 다툼은 하늘로부터 난 지혜의 모습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위로부터 난 지혜는 화평입니다.
잠언 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에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면서 풍요하게 살고자 애를 쓰지만, 부부나 가족과의 관계가 좋지 못해서 다투며 불화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지혜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잘 먹고 풍요하게 사는 것보다, 화목한 관계를 맺고서 살아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우선시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화평하고자 하는 것은 하늘의 지혜를 가진 자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된 저와 여러분들과 화평하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 가장 큰 희생을 치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과 죄인들을 화목케 하시기 위해서 자원함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평하기 위해서 힘쓰셨고, 그러기에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들입니다.
하지만, 화평한 인간관계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할 때에 화평을 이룰 수 있는지를 구하며 살아갈 때에 그 화평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6:28-2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네 이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저주하고, 모욕하고, 뺨을 치고, 겉옷을 뺏는 사람과 화평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이 상황에서, “멍청하게 왜 당하고만 있냐? 그러한 사람은 멱살을 잡고 본 때를 보여줘야 한다.” 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이들과 다투지 않고 화평하는 지혜의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은 상대방을 위해 축복하고, 기도하고, 다른 뺨도 때리라고 돌려주고, 속옷도 내어 주라고 하십니다. 어리석어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평화를 사랑하는 Peace maker 를 지혜롭다고 하시지, 매사에 다툼을 불러 일으키는 Trouble maker 를 지혜롭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화평하기 위해서, 때로 다른 뺨까지 내어 줄 수 있는 사람이 하늘의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관용한다고 했습니다. 관용이라는 뜻은 ‘온화한, 너그러운’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사도바울은 빌립보교인들에게 서로를 너그럽게 대해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가까이 오시면서 나타나는 현상가운데 하나는 관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 세상 가운데 관용을 보시를 원하시니, 관용하라고 합니다.
수도사인 성 프랜시스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산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프랜시스와 제자들이 모두 외출한 상태였고, 한 소년만이 혼자 남아서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때 악명 높은 산적 셋이 집을 찾아왔습니다. 그 도적을 본 소년은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용기를 다하여 큰소리로 호통을 쳤습니다. “남들은 땀 흘려 일하는데 너희들은 남의 것을 훔쳐 먹으려는 것이냐!” 도적들은 마음이 찔렸는지 그대로 돌아갔습니다. 프랜시스가 오자 이 소년은 자랑스러운 듯이, 자신이 도적들을 호통쳐서 보낸 일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프랜시스가 말을 합니다.
“그건 네가 실수했다. 지금 곧 도적들에게 가서 이 빵과 포도즙을 주고 오너라.” 소년은 스승, 프랜시스의 말대로 그들을 바로 쫓아가서 빵과 포도즙이 든 선물을 전달했는데, 그들은 그것을 먹지 않고 소년을 따라 수도원으로 왔으며, 회개하고 프랜시스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프랜시스는 도적까지도 관용하며 대하는 지혜가 있었고, 그 관용이 사람을 변화시켰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대하는 사람에 대해서 적대심을 가지고 대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설령 화를 나게 하는 상황이라도 참고 인내하며 관용으로 대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관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기 맘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진노로 대하지 않으시고, 관용하며 사랑으로 대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관용을 베푸신 하나님은, 또한 다른 이들에게 관용하는 것이 지혜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관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때로 가깝고 편한 사이일수록 관용하지 못하고 화를 내며 살아가기 쉽습니다. 집 밖에서는 젠틀맨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집안 사람에게는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관용하지 못하고, 적대시하며 살아가기 쉽습니다.
한국에, 이혼율이 높아지고 있는 20-30대가 이혼하는 가장 큰 이유가 성격차이라고 합니다. 서로의 차이에 대해서 관용하지 못하고 다투다가 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의 관용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나와 연령이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나라가 다른 이들 일수록 더욱 관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관용하지 못하면 서로의 관계가 멀어지고 헤어지지만, 서로 관용할 때에 더욱 긴밀한 관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위로부터 나온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가지고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참 지혜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어리석은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저와 여러분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입니다. 그래서 위로부터의 지혜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는 하나님과 같이 성결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순수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갑니다. 거짓된 세상에서 거짓없는 성결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지혜는 하나님과 같이 화평하는 것입니다. 평화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지혜입니다. 다툼이 있는 곳에서도 평화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지혜는 하나님과 같이 관용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상대할 때에 너그럽게 받아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지혜는 위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또한 하나님의 성품이기도 한 것입니다. 결국 지혜롭게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간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1: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성결하기 위해, 화평하기 위해, 관용하기 위해서 늘 하나님께 그 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행하십시오.
우리의 행함을 통해서, 하늘의 신령한 지혜가 우리 가정과 교회, 또한 이 땅에 온전히 드러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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