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3/2024 -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요한계시록 2:18-29]
https://youtu.be/-RlNiNdfKLM
지난 한 주간, 우리교회에서 샌안토니오 지역 한인교회, 연합부흥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가 필요한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교회를 사용하여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서로 합력해서 하나님의 선을 이루신 우리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소멸치 않고, 그 은혜를 누릴뿐만 아니라, 그 은혜를 주변으로 흘려보내는 통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그 동안 예수님께서 요한을 통해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들에게 보내신 편지를 보고 있습니다. 그 동안 3교회에 보내시는 편지를 보았습니다. 첫번째가 에베소교회, 서머나교회, 버가모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네번째로 두아디라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에 편지를 하십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소아시아의 서해안 근처에 있는 도시입니다. 현재 지명은 '튀르키예' 서부에 있는 '아키사르' 라는 곳입니다.
요한은 먼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 이것은 두아디라 지역의 특색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눈이 불꽃같다 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이런 표현은 그 지역에서 섬기는 아폴로와 관련이 있습니다. 두아디라에는 아폴로 신전이 있어서 사람들은 아폴로 신을 숭배했습니다. 아폴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신인 제우스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아폴로는 태양과 광명을 주관하시는 신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의 눈은 불꽃과 같다고 했습니다. 곧 예수님은 불꽃 같은 눈으로 세상을 감찰하시며 통치하시는, 아폴로와 비교할 수 없는 참된 신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은 빛난 주석, 청동과 같다고 했습니다. 두아디라의 특상물 중에는 청동제품들로 만든 상품이나 무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발은 청동과 같으니 얼마나 강합니까? 예수님은 강한 능력의 하나님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불꽃과 같은 눈으로 세상을 살피시고 통치하시는 분, 지금도 우리를 불꽃같은 눈으로 주시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세상에 어떠한 것보다 강하시고 빛나시는 분이 예수님이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1. 그러한 예수님께서 두아디라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으십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안다. 그리고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라고 했습니다. ‘사업’이라고 했는데 이들 두아디라교회의 행위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 행위는 사랑과 믿음, 섬김과 인내였습니다. 예수님이 보시니, 그들의 믿음도 좋았고, 서로 사랑하고 섬김도 좋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가 기분좋을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내하며 꾸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네가지 덕목들은 관계적인 면입니다. 교회안에서 서로의 관계는 아주 중요합니다. 교회안에서 서로 맡겨진 사역이 있습니다. 그런데 관계를 무시하고, 사역에만 집중하게 되면, 믿음의 공동체가 흔들리게 됩니다. 주님의 일을 할 때에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믿음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업적을 위한 사역으로 하다가 보면 다른 사람이 자신이 한 일을 알아주기를 원하고, 자신의 기대한 바에 이르지 못한 반응이 나오면 섭섭해지고, 관계가 틀어지기 마련입니다.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겸손과 안내입니다. 주님의 일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섬기셨듯이 겸손한 자세로 인내하며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루아디라 교회가, 사랑과 믿음, 섬김과 인내로 살았음을 아셨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어떤 부분을 예수님께서 알아주시기를 원하십니까? 지난 한 주간, 누군가를 사랑하고, 믿음을 드러내는 삶을 살고, 다른 사람을 겸손히 섬기고, 인내하며 믿음을 지켜 나갔다면 주님께서 이를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루아디라 교회는 처음 행위보다 나중 행위가 더욱 많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처음에 교회에 나오면 은혜를 받고 열심으로 예수님을 섬깁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저런 일들을 경험하다가 보면, 그 열심이 식어지기 십상입니다.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을 잃어 버려 책망을 받았는데, 루아디라 교회는 이와는 반대로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좋은 믿음으로 성장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과거의 모습보다 지금의 믿음과 사랑이 더 좋습니까? 아니면 왕년이 좋았는데 하면서, 과거의 믿음생활을 회고만 하고 있으십니까? 저와 여러분들에게 늘 신앙의 진보가 있기를 원합니다. 날마다 사랑과 믿음, 섬김과 인내에 진보가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은 먼저 루아디라 교회가 행한 행위를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 다음에 뭐가 기다리고 있습니까? 책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루아디라 교회가 받은 책망은 그들이 여자 이세벨을 용납했다는 것입니다. “이세벨” 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별로 좋은 이름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에 나오는 이세벨은 아합왕의 아내로 이스라엘에 살면서, 바알을 들여와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도록 했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죽였기 때문입니다. 악녀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인물이 루아디라 교회에 등장한 것입니다. 그녀를 여자 이세벨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여자’의 원어 ‘귀네’ 는, 유력한 인물을 부를 때의 호칭입니다. 이세벨은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고, 교회안에서도 그녀의 영향력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녀를 말하기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교회가 인정한 영적인 지도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스스로 선지자고 여기면서, 마치 자신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전했던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으니까 사람들 중에는 그녀의 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조심해야 할 것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해서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한국에 보면, 많은 이단들과 사이비들 교주들이 있습니다. 자신을 예수라고 하는 사람들이 약 5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다고 하면서, 결국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사람들에게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세벨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종들이면,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교회의 목회자의 말을 들어야 할텐데, 어떤 이들은 자칭 선지자라고 말하는 이세벨의 말에 현혹되어 행음을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두아디라교인들 중에서 왜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라 음행을 행하고, 우상의 제사 음식을 먹습니까? 왜 궂이 그렇게 했을까요? 이세벨의 가르침이 그들의 필요에 맞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풍요와 즐거움의 욕망에 부합하는 가르침을 이세벨이 주었던 것입니다.
당시 그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상업도시인데 길드라는 상인들의 조합이 있었습니다. 길드는 그곳의 상권을 좌지우지했습니다. 그러기에 그 길드에 가입해야 상업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로마의 황제를 주라고 고백하며, 황제숭배를 해야 했습니다. 그동안 루아디라 교인들은 예수님만이 그들의 주인임을 고백하며, 길드에 가입하지 않았기에 불이익을 당했고, 교인들은 이를 감수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당하는 고난들을 믿음의 증거로 삼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즐거움이나 풍요를 위한 목적이라면 우리는 이세벨의 말에 현혹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세벨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처럼 하면서, 예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결국 구원에 이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세벨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은 의식이니까 해도 괜찮다고 합니다.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니까 하나님도 이해하신다고 말합니다.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 말을 이세벨이 할때에 그들은 그 말에 동의하고, 영적 간음을 하고,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까지 먹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아디라 교회가 이세벨을 용납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용납하다라는 뜻은 “내 버려두었다.” 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니, 이세벨은 거짓된 가르침을 교회안에서 가르쳤고,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습니다.
우리가 용납해야 할 것과 용납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골로새서 3:13-14절에,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연약하고 부족하여 행해지는 잘못은 서로 용납하고 사랑으로 덮어야 합니다. 그런데 용납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대적하는 말이나, 예수님의 복음을 왜곡하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구원과 관련있기 때문입니다. 신천지나 여호와 증인들과 같은 이들이, 그리고 우리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우리 귀에 듣기에 좋은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에 어긋난 것이라면 이를 용납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3. 그리고 예수님이 이세벨을 보면서 원하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회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세벨의 잘못을 모르시는 바가 아닙니다.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기다리시는 것이 있는데, 그녀가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잘못할 때에 돌이킬 수 있도록 경고하십니다. 때로 다른 이들을 통해 말씀을 주시기도 하시고, 그 마음에 죄책감을 주실때도 있습니다.
그 때에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세벨은 예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셨지만 회개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고집합니다. 결국 그녀는 멸망길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의 죄를 깨달음에서 옵니다. 그런데 회개치 않는 이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회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민감하지만, 자기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무감각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많은 우리에게 회개의 시간을 주십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사람을 용서해 주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가 성찬을 하면서 가장 기쁜 순간이 용서의 확증시간입니다. “이 기쁜 소식을 들으십시오.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통회하고 자복하는 심령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이 시간 여러분이 용서받았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우리가 내 자신을 살피지 않으면 내가 더러운 상태에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얼굴에 무엇이 묻었는지, 이빨에 고추가루가 끼었는지, 옷에 먼지가 묻었는지를 알려면 누구보다 먼저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다윗을 보면, 그가 그의 신복인 우리아 장군의 아내인, 밧세바를 범하고,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신복 우리아 장군까지 죽이는 상상할 수 없는 죄를 범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것에 대해서 회개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어느 날 나단 선지자가 그의 죄지은 것을 고발합니다. 그 때에 다윗은 자신의 죄를 숨기지 않고 회개합니다.
사무엘하 12:13절,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나를 살피는 사람이 죄를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고발하시고 회개하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를 죽이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살리려 하심입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를 늘 살피며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죄에 대해서도 우리는 성찰해야 합니다. 내가 한 말과 행동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잘못 행한 일들에 대해서 돌아보고, 이를 회개하고 죄로부터 해결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4. 예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데, 그 기회가 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회개하지 않은 이세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볼지어다.’ 예수님이 회개하지 않은 이세벨에게 어떻게 하는지를 보라고 하십니다. 그녀를 침상에 던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침상’이라는 원어는 ‘클리네’ 인데, 그 말은 “잠자는 침상, 잔치용 상, 환자용 침상’등을 의미합니다. 이세벨이 잠자는 침상에서 음행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이를 회개하지 않았을 때에 예수님은 그를 병상으로 던지시겠다고 합니다. 그녀로 병들게 해서 그 죄로 인해 죽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만으로 그치지 않으십니다.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라”고 했습니다. 그의 자녀라함은 이세벨이 행한 음행의 행위에 동참했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악한 죄에 대해서는 처벌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심판에 이르지 않도록 우리의 죄를 늘 살피며,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5. 그러면 이세벨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은 그들에게는 “다른 짐으로 지을 것이 없다.” 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이 무엇입니까? 죄의 짐입니다. 죄의 짐은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께 우리의 죄를 회개할 때에 사망의 짐으로부터 놓임바 됩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은 예수님께 맡겨버리고, 이제 예수님께서 주시는 짐을 지고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28-29절에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때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어서 손해보고, 고난을 당하는 것을 짐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이세벨은 우리의 짐을 덜어줄 것처럼 말합니다. 우리로 예수님을 믿으면서 오는 어려움 속에서 벗어나게 해 줄것처럼 말하지만, 정작 가장 무거운 죄의 짐, 사망의 짐을 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지어주시는 짐은 무거운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 그 짐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니 가볍게 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짐은 영생으로 가는 우리가 꼭 지어야 짐인 것입니다.
루아디라교회에 주셨던 칭찬이 우리교회에 있기를 바랍니다. 처음 사랑, 믿음, 섬김, 인내가 시간이 갈 수도록 더 많아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짐처럼 여겨지시는 분들이 있으십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구원에 꼭 필요한 것이기에 우리에게 주시는 짐입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늘 구원의 확신속에서 예수님께서 지어 주시는 짐들을 기쁨과 감사로 지며, 믿음의 여정을 걸어갈 수 있는 성도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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