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2/2025 -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 [요한계시록 3:14-22]
https://youtu.be/zm7iWPvbweQ
지난 주일에 우리는 소아시아의 일곱교회 중 여섯번째 교회인, 빌라델비아 교회를 보았습니다. 그 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졌지만,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던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델비아교회를 책망없이 칭찬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일곱교회중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라오디게아교회는 이와는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은 이 교회를 책망만 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게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길래 예수님께서 책망만을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교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아서, 내 입에서 너를 토해 버릴 것 같다."
"토해 버릴 것 같다."는 예수님의 표현이 다소 생소하지만, 라오디게아에 사는 사람들은 이 말의 의미인지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 도시는 물이 부족한 지역에 있습니다. 그래서 14킬로미터 떨어진 히에라볼리의 뜨거운 온천수를 끌어 와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온천수에 각종 성분이 녹아 있어서 물맛도 이상한데, 14킬로미터를 흘러오는 동안 물이 미지근하게 식어있으니, 물을 마시기가 역겨워서 토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토록 라오디게오 교회를 보면서 그들의 행위를 받아들이기가 고욕스러웠던 것입니다. 그 교회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습니다. 그 교회의 교인들을 보면, 교인인지 아니면 세상 사람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습니다.
교회가 타이틀을 달았다고 진정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이 누가 보아도 교회같은 교회가 있는 반면,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세상과 별다름이 없는 교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교회를 토해 버리고 싶어하실 정도로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미국이나 한국에 있는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접하고 있는 환경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들이 라오디게아교회와 같이 되기 쉽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라오디아교회가 책망받은 이유를 살펴 보면서, 우리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반면교사 삼아,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되기를 먼저 축원합니다.
1. 라오디게아 교회가 책망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 중에 하나가, 그들은 자신들의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을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실제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요한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의 부요함은 라오디게아 도시의 환경에 기인한 것입니다. 라오디게아는 동방과 서방을 이어주는 실크로드 상에 있는 도시입니다. 사람과 물자들의 왕래가 많으니 그 도시에 돈이 몰리게 되고, 금융산업이 발전되어 라오디게아는 부유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에 의하면, 주후 13년과 61년에 큰 지진이 있었는데, 로마 중앙정부의 지원없이 지방 정부만의 힘으로 파괴된 도시를 재건했을 정도로 재정이 풍부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라오디게아는 자치적인 성격이 강했고, 로마 황제숭배에 대한 강요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있던 라오디게아 교회도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로 인한 혜택을 보았습니다. 로마 황제 숭배에 대한 강요가 없으니,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경제적 활동이나 사회활동을 하는데도 교회에 다닌다고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라오디게아 교회는 경제적으로 부요했고, 신앙생활도 편안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하면 참 잘 할 것 같지요. 그런데 그것이 그 교회에게 독이 되었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요하고 생활이 편안한 것은 좋은데, 반면에 영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평가입니다.
라오디게아교인들은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그들이 괴로운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적으로 볼 때 부러워할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그들이 가련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예수님은 그들이 가난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그들이 가난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눈이 멀었고, 벌거벗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최고의 문제점은 그들의 영적인 무지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영적인 상태가 어떤지를 알지를 못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부요하다고 해서, 영적으로 부요한 것은 아닙니다. 라오디게아교인들은 자신들이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했는데 그것은 세상적인 시각이고, 실제 영적으로는 부족한 것 투성이었던 것입니다.
자칫 우리가 이러한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교회와 성도의 삶이 세상적으로 풍요하고, 편안한 삶을 살아갈 때에,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이루고, 자녀들도 잘 되고 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된 이유가 자신들이 좋은 신앙인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염두해야 할 것은, 교인들의 세상적인 부요함이, 영적인 부요함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했지만,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 그들은 영적으로 너무 빈곤한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부요함은 무엇입니까?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백은 라오디게아교인들이 말하는 부요함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다윗은 세상적으로는 가난과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양을 치는 거친 일을 했던 소년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장해서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을 피해 죽자살자 도망하는 신세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는 것은, 그가 세상적으로 부요하거나 권세가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되시어서 자신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심을 믿었고, 그 목자를 따르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에는 그 어떤 것도 부러워할 것이 없었고, 그 자체가 만족이요 부요했던 것입니다.
교회의 진정한 부요함은 세상적인 재산, 권력, 지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부요함은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에 계심을 체험하며,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때인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적으로 가난하던, 부요하던지 상관없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진정한 부요함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진정한 부요함으로 고백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교회를 책망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가 바른 교회로 회복 될 수 있도록 처방을 내리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서 보게하라” 고 합니다.
1) 먼저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금은 믿음에 비유됩니다. 교회의 부요함은 불로 연단된 금과 같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의 믿음은 불순물이 가득한 금과 같아서 가치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불로 연단을 받아 정금과 같은 믿음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금은 뜨거운 불로 연단을 받아 불순물이 다 태워진 다음에 얻어지는 것입니다.
욥은 고난을 당하는 중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욥기 23:10)
교회는 고난 중에 믿음의 온전해 지고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가 세상의 풍요와 평안을 추구하게 되면 영적으로 나약해지고, 타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풍요하고 편안하게 살기 위해, 적당하게 세상과 타협하며 신앙생활을 한다면 영적인 나약함과 빈곤함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아가다가 손해를 보고 고통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이를 기쁘게 여기며 담대히 믿음의 길을 갈 때에 불로 연단한 정금과 같은 믿음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참으로 부요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예수님은 라오디게아교회에게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하십니다.
라오디게아는 양털로 옷감을 만드는 모직과 목화로 옷감을 만드는 면직이 유명합니다. 그들은 외형적으로 좋은 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옷은 그들의 벌거벗은 수치를 가릴 흰옷이었습니다. 벌거벗었다고 하면 얼마나 창피하겠습니까? 그런데 영적으로 벌거벗은 수치라는 것은 더러운 죄로 인해서 부끄러움의 상태에 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교회는 자신들의 수치조차도 모르는 죄에 무감각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이를 보고 계시는 예수님은 그들이 흰옷을 입고 수치를 면하라고 하십니다. 죄가운데 있을 때에 그 죄의 수치를 덮어줄 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진 흰옷 밖에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영적으로 벌거벗은 자와 같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며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3) 그리고, 에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하라고 하십니다. 라오디게아의 특산물 중에서 유명한 것이 안약이었습니다. 그 안약은 그 지역에만 나는 프리기안(Phrygian)으란 식물로 만든 안약인데, 그 안약은 효과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영적으로 안약을 사서 발라서 보아야 할 정도로 영적인 눈이 어두워졌다고 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은 세상적인 것을 보는데는 눈이 밝았습니다. 그들 눈에는 돈을 버는 방법이 보이고, 성공하는 길이 보이고, 출세의 길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영의 눈이 어두웠던 것입니다.
교인은 세상의 지식, 세상적인 정보를 통한 지혜,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보이는 이 세상을 주관하고 계시는 영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교인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속에 이루어지는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 그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어두워지면 영적인 맹인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요 9:41) 하셨습니다.
육신의 눈이 나빠져서 침침해 지면 사람들은 그냥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잘 보기, 안경도 맞추고, 라식 수술도 하고, 백내장 수술도 하고, 눈에 좋은 약을 먹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도는 영적인 세상을 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운영하시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내 삶가운데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는 영적인 훈련들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을 잘 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영적인 눈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것뿐만 아니라, 영적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랍고 신기한 일입니까? 이를 사모하시며, 영적으로 눈이 열릴 수 있기를 위해서 힘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불로 연단받은 금, 수치를 가릴 흰옷, 눈먼 것을 밝혀줄 안약을 누구에게 사라고 하십니까? 예수님에게서 사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금과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씻기시고 정결케 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눈멀어 있을 때에 빛이 되셔서 보게 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를 거져 가져가라고 하지 않으시고, 사라고 하십니다. 이는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시간과 노력, 재물, 재능을 치르고, 헌신하는 이들에게 영적인 풍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영적인 부요함을 누리기 위해, 그 만한 대가를 치르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교회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때로 교회에 대한 평가가 외적인 부요함을 기준으로 할 때가 있습니다. 외적으로 부요한 교회가 영적으로도 좋은 교회, 부요한 교회로 생각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세상적인 부요함이 영적인 부요함과 반드시 일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정할 때에, 좋은 시설과 프로그램을 다 갖추고, 교회도 부담없이 편하게 다닐 수 있는 교회를 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영적인 부요에 관심이 없고, 세상 사람들과 같이 세상적인 부요와 편안함을 추구하는 신앙들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께 책망받을 일입니다. 이런 이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뜨겁던지 차갑던지 하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토해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성향의 성도와 교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일 수록,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라고 고백했던 다윗과 같이,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며, 영적으로 부요한 삶을 살아가는, 주님께 칭찬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