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0/2025 -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 [요한복음 10:7-10]
https://youtu.be/95v4iLsikoc
우리 모두는 사순절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 기간에 우리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여정을 깊이 묵상하며, 고난과 죽음 가운데 피어나는 우리를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고 고백하는 시간이 되시길 먼저 축원합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 스스로가 자신은 누구신지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생명의 빛이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양의 문’ 은 양들이 들락날락하는 문입니다. 목자들이 양에게 좋은 꼴을 먹이기 위해서 양 무리를 풀이 있는 들판으로 끌고 갈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목자는 며칠 동안 양들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들판에서 양들과 함께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 이야기를 보면, 천사가 밤에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나타났었는데 그 목자들이 양들에게 좋은 풀을 먹이기 위해서 밤에도 들판에 머물면서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밤이 되면 목자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간이 우리를 만들어서 양들을 집어 넣거나, 이런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돌로 쌓은 공동 우리에 양들을 집어 넣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에는 문짝은 없습니다. 문이 없으면 외부의 약탈하는 사람이나 양을 노리는 맹수들이 양의 우리에 들어가 양들을 해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목자가 하는 일은, 양들이 들어가고 나가는 그 문 위치에 드러 눕습니다. 목자 자신이 그 양의 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들을 공격하려는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양들을 보호해서 양들의 생명을 지켜 줍니다.
그런데 양들의 문들이 되셔서, 양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분이 목자이신,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왜 예수님께서 양의 문이 되어야 하는지,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여러분은 자신을 동물로 비유한다면 무엇으로 비유하고 싶으신가요?
사람들은 종종 어떤 사람을 묘사할 때 동물에 비유할 때가 있습니다. 용감한 사람을 보면 호랑이같다고 말합니다. 교활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여우같다 라고 말합니다. 빨리 움직이는 사람을 보면 치타같다고 하고, 느리고 미련해 보이는 사람을 보면 곰같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사람을 양으로 비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윗 같은 경우에도 시편 23편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곧 자신을 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도 예수님 자신은 목자이고, 사람들은 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사람들을 양같다고 했을까요? 우리는 어떤 사람을 양같다고 합니까? 어떤 사람을 양과 같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온순하고 깨끗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양으로 비유하신 것은 그러한 개념이 아닙니다.
양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흔히 키우는 가축이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양이 다른 동물에 비해서 열등한 존재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양은 시력이 좋지 않습니다. 3미터 밖에 것은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양이 무리를 지어갈 때에 양들은 자기 앞에 있는 양의 뒷모습을 보고서 따라갑니다. 그래서 앞에 있는 양이 낭떨어지에 떨어지더라도 뒤에 있는 양들은 계속 그뒤를 따라 낭떨어지로 떨어집니다. 양은 시력이 좋지 못하니 풀이나 물이 있는 곳을 제대로 찾지 못합니다. 그리고 양의 몸은 균형있는 몸매가 아닙니다. 몸통에 비해 다리가 약합니다. 그래서 제대로 달리지도 못하기에 맹수들의 추격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임신한 양이나 살찐 양이 넘어지게 되면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대로 놔두면 굶어 죽든지, 맹수에게 잡혀 먹혀 죽던지 하는 것입니다. 양의 하얀 털이 깨끗해 보이지만 실제로 보면 먼지 등으로 더럽고, 냄새도 많이 납니다. 그러니 양들은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고, 목자의 손길이 많이가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이런 양의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대단한 존재라고 여기지만, 사실 자신을 스스로 돌보기도 어려운 양과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 약한 존재입니다. 이사야 53: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양들은 분별력이 없습니다. 시력이 안 좋아서 멀리 있는 것을 보지 못하니 제대로 앞의 일을 판단을 하지 못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앞으로 이 세상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한치 앞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무지한 상태에서 내 뜻대로 살아가다가 그릇행하여 죄를 짓는 것이 사람입니다. 때로는 그릇행하면서도 그것이 그릇된 일인지를 모를 정도로 무지하기도 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사망에 이르는데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양과 같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2. 그런데 그러한 양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목자가 있으면 가능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 말고도 양을 주목하고 있는 존재가 있습니다. 도둑과 이리, 삯꾼과 같은 존재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양들을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도둑들은 양들이 자신의 것이 아닌데도 그것을 훔쳐서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자신이 주인행세를 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이 나의 주인 행세하려고 한다면 조심해야 합니다. 재물을 나의 주인처럼 섬긴다고 하면 이것 또한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목자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된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주인되신 목자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양이 가져야 할 지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 조심해야 할 사람들 중에 종교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알고 가르치는 위치에 있으면서 자신들은 정작 제대로 율법을 지키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지키기 힘든 무거운 법 조항을 만들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소망을 빼앗아 간 것입니다. 천국의 소망을 빼앗아 가는 자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삯꾼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 삯꾼은 이리가 오면 자신의 양이 아니기 때문에 양을 버리고 도망간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이단 교주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마치 예수님인것처럼, 대단한 영적인 존재인 것처럼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웁니다. 그들이 영적 지도자라고 말하지만, 그들의 관심은 양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은 자신에게 불리한 일이 있게 되면, 양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해하려고 하는 도둑과 강도, 삯군, 이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늘 우리를 해하고 멸망시키려는 사탄의 세력을 인식하고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들을 해하려는 존재와는 정반대인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양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 있게 말씀하십니다.“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5절)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자신의 양을 이리로 부터 구하시기 위해서,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셨습니다.
이사야 53: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스스로 감당할 수 없으니, 하나님은 예수님께 그 죄를 담당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리와 같은 사탄의 공격으로 부터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양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목자로 여기고, 그분 만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3. 10절에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풍성함은 세상적인 풍성함이 아닙니다. 영적인 풍성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주님께서 주시는 풍성함을 잘 누리고 사십니까?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주지 못하는 영적인 풍성함을 누리면서 살도록 하십니다.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세상 사람들도 평안을 얻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평안을 얻기 위해 술을 마시고 약물을 복용하는 등 인간적인 방법을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은 도리어 사람들에게 염려와 불안, 우울함을 만듭니다. 주님을 떠난 삶은 그 영혼이 빈곤해지고 피폐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목자로 해서 따라갈 때에, 모든 환경과 상황을 극복하는 하늘의 평안이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영적 풍성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는 우리는 참 평안, 사랑, 기쁨, 능력을 누리는 것입니다. 불안한 상황가운데서도 평안하고, 가진 것이 없어도 풍성함을 경험하며, 약한 가운데서도 강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영적 풍요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풍성함을 얻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목자의 음성을 잘 듣는 것입니다.
3절에,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문지기가 문을 열때에 목자는 양들을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양을 내 놓고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목자를 따라 온다고 하십니다.
양들은 시력이 아주 좋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그대신에 양들은 청력이 발달되었습니다. 그들은 목자의 소리에 반응해서, 목자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따라서 가게 되면, 양들 스스로는 도달할 수 없는 푸른 풀밭으로도 가고, 잔잔한 시냇물가로 가고, 풍성한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1) 목자는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주시는 분입니다. 목자는 각 양들의 이름을 지어주었고, 양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양들을 사랑합니다. 목자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이름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십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시며 말씀하십니다. “혁이야. 나를 따라오렴, 그러면 세상이 주지 못하는 영적인 풍성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반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자의 음성은 특별한 사람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말씀에는 목자이신 하나님의 수 많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목자의 음성임을 깨달아, 더욱 경청하며 읽고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이 아닌 다른 소리를 분별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양을 미혹하는 사탄의 음성도 즐비합니다.
그런데 목자를 아는 양들은 타인의 음성을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않고 도리어 도망한다고 했습니다.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양이면 참으로 훌륭한 양일 것입니다.
그런데 양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내가 목자의 음성이 아니라, 도둑과 강도의 음성에 유혹당할 수도 있음을 조심해야 합니다. 때로 사탄은 예수님의 목소리보다 더 달콤한 말로 우리를 유인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을 따르면 더 많은 꼴을 얻고 풍성한 삶을 누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럴 때에 성도는 그 말을 하는 자들로부터 도망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종종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십니다. 귀가 있다고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늘 목자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자 얼마나 집중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살다가 보면 내가 듣고 싶은 소리를 듣고자 합니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하면 딴청을 피우거나 들으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관심하는 것을 말하면, 귀가 솔깃하여 그 말을 경청하며, 반응합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음성은 목자, 예수님의 음성이요, 말씀입니다. 우리가 누구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지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아니면 말씀에 근거하지도 않은 사람들의 말입니까? 아니면 내 생각입니까? 누구든지 목자 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바로 성경을 통해서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목자의 음성을 듣기를 소원하여야 합니다. “목자되신 예수님, 오늘도 말씀으로 저를 인도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양과 같이 근시안적이고, 연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내 마음대로 가다가는 죄로 인해서 필경 멸망당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과 풍요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쫓아 양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영적인 풍요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목자되신 예수님을 내 주인으로 모시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내 삶을 예수님께 모두 맡기고 살아갈 때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줄 수 없는 영적인 풍요를 누리며 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도 나의 이름을 부르시며, 나를 따라오라고 하시는 분, 나를 사랑하셔서 목숨까지 버리신 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생명이 요동치는 일이며 영적인 풍요를 누리는 일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풍요를 누리는 주님과의 동행이 날마다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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