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3/2025 - 나를 강권하는 그리스도의 사랑 [고린도후서 5:13-16]
https://youtu.be/RqxKrHjEhSE
사람들마다 어떤 일을 할 때에 그 일을 하게 하는 요인들이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에 한 친구가 있었는데 갑자기 옷에 신경을 쓰고 거울을 보며 멋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얼굴도 싱글벙글 입니다. 왜 이러한 행동을 합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 동안 안하던 일을 합니다. 배가 고픈 사람은 배에 거지가 있는 것처럼 허겁지겁 먹게 됩니다. 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말하는 내용들이 경제, 투자, 돈과 같은 것들입니다.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사고에 사로 잡힌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어떤 사람이나 상황을 말할 대에, 늘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이야기만 합니다. 반대로 어떤 분들은 긍정적인 눈으로 보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을 칭찬을 하고, 그 상황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열심을 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무엇에 사로 잡힌 사람일까요? 바울이 고난과 죽음을 무릅 쓰면서까지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섬겼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자신과 그 일행이 무엇에 붙잡혀 그 일들을 했는지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강권하시는도다' 에 해당하는 '쉬네케이'라는 말은, '휘어잡다. 강요하다. 꽉 붙든다' 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신들을 꽉 붙잡아서, 그 일들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을 붙들었던 사랑은 세속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은 무엇에 대한 사랑에 붙들려 있습니다. 이기적인 사랑에 붙들린 분도 있으시고, 잘못된 대상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세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함을 받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도 처음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그를 강권하는 것은 율법적인 의였습니다.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데 사로 잡혔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대해서는 정죄하는 일에 사로 잡혔습니다. 자신의 의,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과 독선에 사로 잡혔습니다. 그렇게 되니 바울이 어떤 사람이 됩니까? 기독교인들을 잡아서 박해하는 악을 행하게 됩니다. 악한 영에게 사로잡히면, 나는 선과 의를 행한다고 하는데, 결국 죄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바울이 자신이 조롱하고 핍박했던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의 삶은 교만과 미움에 붙들린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들린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이후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갖 위험을 당합니다. 조롱과 핍박을 당합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핍박하는 그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강권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저와 여러분도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함을 받아, 복음을 전하고, 시험을 이기고, 나를 핍박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을 떄에는 우리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들림을 당할 때에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시는 삶은 어떤 삶인지? 나는 무엇이 강권하는 삶을 살아가는지를 살펴 보시겠습니다.
1.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가 죽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아가지 못함으로 인해 낙심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들린 사람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나를 죽여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랑입니다.
로마서 5: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확증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지 않으셨으면 얼마나 큰 일입니까? 우리 모두는 죄로 인해서 모두 지옥에 갈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서 펄펄 끓는 지옥의 불못에서 만나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모두는 구원 받아 천국에서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기에 우리는 자유롭게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예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믿는 우리 모두는 예수님과 같이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라, 사탄의 죄의 권세에 강권당하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는 삶을 살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를 십자가에 못을 박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 예수님과 함께 내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으니,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십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죄의 권세가 나를 강권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죄에 대해서 죽지 않으면 그 죄는 나를 강권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만 나를 강권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의 죄의 권세가 나를 강권하는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죄를 짓도록 강권하는 것입니다.
죄에ㅜ대해서 죽지 못한 사람은 사탄의 죄의 권세 강권을 당하는 삶을 삽니다. 어떤 사람은 거짓에 붙들려 살아갑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진리를 거스리는 일들을 합니다. 어떤 분은 미움의 죄에 빠져서 살아갑니다. 사람을 미워하도록 죄가 충동질을 할 때에 미움에 빠져서 사는 분들도 계십니다. 어떤 사람은 각종 부정적인 생각, 염려와 걱정에 사로 잡혀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탄의 죄의 권세에 붙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를 죽여야 합니다. 그럴 때에 죄로부터 벗어나,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2:1절에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라고 했습니다. 죄는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하지 못하도록 얽맵니다. 우리가 죄에 붙들리지 않으려면 날마다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예수님도 나를 따오려거든 날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나의 죄됨이 죽지 않으면 나도 죽고, 다른이들도 죽이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나를 못박게 되면,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게 됩니다.
내가 죄에 대해 죽을 때에 미움과 시기와 질투, 탐욕과 쾌락, 온갖 죄의 더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다른 이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내 가족이 살고, 내 교회가 살고, 이 세상을 살리는 것입니다. 내가 죽을 때에 내가 살고 다른 이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내가 죄에 대해서 죽을 때에, 그리스도의 사랑의 능력을 발휘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시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우리를 위하여 삽니다. 내 삶의 초점이 바로 자신에게 꽂혀 있습니다. “나의 유익, 나의 기쁨, 나의 행복, 나의 만족, 나의 성공, 나의 풍요, 나의 편의, 자기 자랑…” 과 같이 나를 위한 삶에만 관심한다면 이러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은 이제 예수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위한 것인지를 생각합니다. 예수님 이라면 너떻게 하셨을지를 관심합니다.
1) 예수님을 위해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자이시고, 우리의 주인이심을 증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복음을 전하고, 삶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이 예수님을 위한 것입니다.
2)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바울은 지독하리만큼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강권하니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바울은 각 지역에 믿음의 공동체가 세워지기 위해 고난을 받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잘 세워져가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는 것입니다. 교회가 굳건히 세워지기 위해서는 고난이 뒤따르게 됩니다. 교회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교회가 어떻게 될지는 생각하지 않고, 나만을 위하여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3)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산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다른 이들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갈 때에, 우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증거되고,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사랑을 이야기할 때 늘 제 마음을 움직이는ㄴ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가정에 남자 아이가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어린 아이가 피를 흘리고 무의식상태로 응급실에 들어갔습니다. 피를 많이 흘렸기에 수혈을 하려고 하는데 그 아이가 희귀한 혈액형인 RH마이너스였습니다. 병원에 필요한 혈액을 없기에 간호사는 가족 중에서 같은 혈액형이 있는지를 조사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남자 아이의 여동생에 같은 혈액형이었습니다. 부모가 이 사실을 알고 그 딸 아이에게 “너 오빠가 피가 필요한데 오빠를 위해 너 피를 뽑아 오빠한테 줄 수 있겠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딸아이가 조금 망설이더니 헌혈을 하겠다고합니다. 딸 아이는 병원 침대에 누워서 자기 오빠에게 줄 피를 뽑아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이를 흐뭇하게 보고 있었습니다. 피를 뽑은 후 회복하는 시간에 어머니는 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피뽑는 것 무섭지 않았어?” 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조금 무서웠어”라고 말하더니 “그런데 엄마, 나는 이제 언제죽어?” 라고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아이에 말에 놀라서 “네가 죽기는 왜 죽어?” 그랬더니, “피를 뽑으면 죽는 것 아냐?”라고 합니다. 어머니는 너무 놀랐습니다. “그럼 너는 네 피를 뽑으면 네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피를 뽑은 거니?” 그랬더니 딸 아이가 말합니다. “그럼요, 저는 오빠를 사랑하니까요”
많은 세상 사람들이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죽이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내가 죽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을 받는 것은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도리어 기쁨으로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의무적으로, 강요해 의해서 사랑해야 한다면 얼마나 괴롭고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그리스도의 사랑은 강요적인 것이 아니라, 기쁨가운데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요 10:17-18,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누군가에게 사랑하라고 강요를 받으면 참으로 부담스럽고, 그렇게 하기도 힘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내가 강제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할 때에, 이를 기쁨으로 받아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 주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행한 일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가정과 교회, 일터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때문에 연약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도와주고, 나를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힘쓰셨습니까?
성도와 교회의 진정한 힘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할 때에 내 삶이 변하고, 내 가정, 교회, 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 세상은 공중 권세잡은 사탄에 붙들려 그 영향력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대적하며, 죄를 범하며 살아가도록 만듭니다. 노아 시대에 죄가 관영했던 것과 같이 오늘날도 이 세상은 죄의 꾀임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함을 받는 이들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의 강권을 받은 사람입니다. 바울의 복음에 대한 열정이, 사람들을 향한 사랑과 섬김은 의무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들을 강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다른 이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대할 것을 권면합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베드로전서 4:8)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대표적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들릴 때에, 우리의 삶속에서 죄의 권세를 이기며, 사람을 살리는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죄에 대해서 죽고, 주를 위해서 살아갈 때에, 사탄의 강권함을 물리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악한 영의 권세 아래서 죄에 붙들려 있습니다. 미움과 분노, 갈등과 쾌락, 거짓과 불의… 죄가 이 사회를 강권하고 있고, 세상은 이에 끌려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들린 바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내 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죽게 하옵소서.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옵소서. 내가 죽고 다른 이를 살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행하게 하옵소서. 우리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하심에 복종하는 교회가 되어서, 내가 죽어 다른 영혼을 살리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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