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3/2025 - 살릴 결심, 죽을 결심, 사랑할 결심 [요한복음 12:12-16] - 종려주일
https://youtu.be/doGPN_kIV0g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에 그 모습을 보던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듭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길에 깔고 그 위를 지나가게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라고 외칩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찬송합니다.
보통 이러한 환영의 모습은 왕이나 장군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에 맞이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마치 왕이요 구원자로 여기며 맞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왜 그렇게 행동한지 아십니까? 500여 년전에 스가랴라는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는 앞으로 이스라엘을 구할 메시야가 어떤 모습으로 올지를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이 딱 그 모습이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스가랴 9:9)
사람들은 나귀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서, 성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왕이요, 메시야가 온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기쁘게 환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보면서 마냥 기뻐만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눅 19:39)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행렬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을 위태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이라며 환영한 것이, 현재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인 로마의 황제에게는 반역하는 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은 식민지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로마제국에 대한 반란에는 엄격했습니다. 그들은 황제나 로마제국에 대적하는 세력이나 움직임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처단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환영하는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면서, 로마 제국이 이를 로마에 대한 반항세력으로 여긴다면, 로마군대가 이를 진압하기 위해 개입하게 되고, 그러면 예루살렘을 비롯한 이스라엘은 커다란 위기에 빠지게 될 것이 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러한 상황을 모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 일로 인한 가장 큰 위험을 치러야 할 사람은 예수님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당신을 뜨겁게 환영하는 그들을 막지않고 그대로 두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의 왕이요 구원자가 되시길 위해 예수님은 어떤 결심을 하고 예루살렘에 오셨고, 그리고 우리에게는 어떠한 삶, 결심을 요구하시는지를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보면서, 죄인들을 살리기를 결심하시고 이 땅에 오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자신이 왕이요 메시야인 것을 숨기지 않으시고 세상에 공포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세상의 왕이나 장군과는 다르게 나귀를 타시고 오셨습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예수님의 겸손하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왕으로 오셨지만 섬김을 받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그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왕과는 달랐습니다. 세상의 왕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다른 이들을 억압하고 죽이는데, 예수님은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죽이는 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죄인들을 살릴 결심을 하셨기에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의 권세와 싸워 이기실 승리의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왕이요, 메시야로 환영하는 것이 자신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살기를 원한다면, 이들을 당연히 말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도리어, 이 사람들이 외치지 않으면 이 돌들이라도 소리지를 것이라며 그들의 환영 행렬을 막지 않으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그들의 환영이 너무 좋으셔서 그것을 즐기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죽기를 각오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셨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환영의 행렬이 결국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길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오시기 전,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는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꾸짖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사람들을 살리기위해 자신이 죽기로 결단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을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이 모든 사람이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는다고 할지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사람의 죄를 대속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그러기에 죄인은 다른 사람의 죄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조차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아무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 뿐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죄에서부터 살리기로 결심하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은 죽을 결심을 하시고 예루살렘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호산나 외치는 환영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그분이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죽기를 결심하신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죄인인 나를 위해 죽기를 결심하신 분이 우리의 왕 예수님이십니다.
2. 그리고 예수님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죽기로 결단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시기 전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관한 문제로 논의하려고 공회로 모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많은 표적을 행하는 것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요한복음 11:48) 합니다. 그 때 그 해 대제사장 가야바가 말합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예수 한 사람을 죽임으로 온 민족이 망하는 것을 면할 수 있고, 이것이 모두에게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말은 참으로 합리적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죽임으로 이스라엘의 불안 요소를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은 정치적인 유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말한 것이었지만,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적인 구원의 원리를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12:24절에,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면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러한 밀이 되어 죽으시겠다고 결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 열매는 구원받는 자를 의미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죽으셔서 맺게 된 구원의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죽음으로 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의 부귀와 영화를 주시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언제든지 잃어버리고 썩어질 허망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허망하게 죽어갈 죄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시고자 죽으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후에 예수님은 줄곧 죽음을 부르는 일을 하십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십니다. 이로 인해서 성전을 담당하는 대제사장을 비롯한 사두개인과 더욱 대립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과 논쟁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그들의 예수님을 죽일 결심은 더욱 굳어져 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보다는 그 죽음 뒤에 있을 열매를 꿈꾸셨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많은 구원의 열매가 맺어졌는데, 그 열매가 바로 저와 여러분인 줄 믿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영생의 열매가 되게 하시고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결심이 있으십니다.
“너희도 죽으라” 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후에, 이제 죄로부터 자유케 되었으니 마음대로 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죄에서 자유케 되었으니,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말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6:24-25,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요구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요청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그 뜻은 죽으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사형을 받은 사람이 죽기 위해 지는 것입니다. 보통 십자가는 강제로 주어지지만,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스스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 자기 자신을 부인하셨습니다. 자신의 영광, 전능하심, 하늘의 영광을 다 부인하셨기에 십자가를 지실 수 있으셨습니다. 이에 비해 저와 여러분은 그리 부인할 만한 것이 대단한 것들은 아닌듯 싶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인할 때, 비로서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이 죽는 길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생명의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고,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고 하십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일이라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지만, 그 길을 온전히 걷고 영생에 이르기 위해서는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자기 부정이 있으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아버지, 제 잔을 옮겨 주십시오. 하지만 나의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기를 결단하신 것은, 그가 힘이 없어서 강제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죽고자 결심했던 그 이면에는 사랑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을 핍박하는 이들까지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저들은 저들의 죄를 모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예수님은 양과 같이 우매하여 그릇행하는 죄인들을 사랑하셨기에,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날마다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것도, 예수님을 사랑할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할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필요한 능력은 사랑입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역사할 때에 우리가 예수를 위해 죽을 수 있고, 사람들을 위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도 살고, 다른 이들도 살리는 영생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환영을 받으실 때에, 예수님은 그 길이 곧 십자가의 길임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분명합니다. 죄인을 살리기를 결심하셔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죽이기로 결심하셨기에 예루살렘을 나귀타고 들어오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그를 따라 오라고 하십니다. 살고자하면 죽지만,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듯이,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해서 죽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생명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을 때에 내가 살고, 다른 이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나귀를 타고 들어오시는 화려한 행렬 속에서 우리는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고뇌와 결심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죽이고자 하셨습니다.
우리도 종려주일을 보내면서 예수님처럼 결심 하나 했으면 좋겠습니다. 죽을 결심입니다.
바울도 고린도교인들에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예수님과 같이 할 결심이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살릴 결심, 이를 위해 내가 죽을 결심, 그리고 이 모든 결심의 원동력이 되는 사랑할 결심입니다.
이 모든 결심이 행함으로 이어져서, 우리가 죄에 대해서는 죽고, 예수로 삶으로 말미암아 우리 가정, 교회, 이 사회를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고 간증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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